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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솔 Jul 14. 2022

사랑은 나눌 때 현실이 된다.

산골 일기 아홉 번째

“돈은 필요 없어요. 사람들을 걱정시키거든요.”

“약간의 걱정은 필요해. 풀만 먹고는 살 수 없어.”

“풀 말고 뭐가 더 필요한지 모르겠어요.”     


영화 ’In to the wild‘에서 청년 알렉스와 집시 여인의 이야기 한 대목이다. 

세상의 부조화와 부도덕함을 떠나 자연인이 되고자 했던 주인공은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태워 버리고 

거친 자연을 향해 길을 떠난다. 

영화에서 알렉스가 돈을 태운 이유는 문명세계와 단절하고자 했던 의지의 상징이었다. 

그 장면은 내게 정말 인상적이었다. 

“풀 말고 뭐가 더 필요한지 모르겠어요.”라는 알렉스의 말에 전율을 느끼며

 나는 몇 번이고 같은 장면을 되풀이해서 보았다. 


은퇴하고 세운 경제적 계획들이 상당 부분 좌절되는 고통이 한창일 때여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온 세상을 얼어붙게 한 팬데믹은 나의 모든 경제적 계획들까지도 꽁꽁 얼려 버리고 말았다. 

특별히 전국적으로 마비된 경제상황 속에서 나의 모든 장밋빛 계획들은 거의 백지화가 되어 버렸다. 

꿈꾸었던 강연 시장은 전폐하다시피 고갈되었다. 

자연히 삶에 대한 걱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런 난감한 상황에서 만난 영화 ’In to the wild’의 돈에 대한 대사는 

머릿속을 번개로 내리치는듯한 충격이었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그리 걱정하고 염려하며 살고 있었던 것일까! 

어쩌면 먹을 수 있는 풀이면 그만인 세상에서 말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집시 여인은 처연한 눈빛으로 자신의 유일한 꿈은

 ‘밝은 태양 아래 돈 안 들이고 사는 것’이라 말했다. 

청년 알렉스는 눈에 덮인 순수하고 청명한 자연 그대로의 산을 바라보며

 “돈, 권력 이런 건 모두 환상이야”라고 외치며 돈 한 푼 없었을 때가 더 재미있는 인생이었다고 고백한다. 

알렉스의 자유로운 삶은 소유와 소유의 의미에 대해 내게 새로운 사색을 안겨 주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돈과 권력, 명예, 성공, 경쟁으로 점철된 세상 밖으로 떠나가도록 한 것일까? 

그 해답은 어느 옥수수 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농장주인과 자신의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알렉스의 말속에 담겨 있었다.     


“자연 속에 들어가 자연과 하나가 될 거예요.”

“그것이 목표라면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나?”

“자연 속에서 어느 순간에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해요”     


알렉스는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여기며 그 자연의 시공간에 존재하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존재의 의미가 충분하다고 느낀 것이다. 

나는 알렉스의 말을 들으면서 거대한 업적이나 성공을 추구하는 삶도 의미가 있겠지만 

존재 자체로 충실한 삶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에 격하게 동의했다. 

그는 순수한 자연의 광휘를 바라보며

 “자유와 순전한 아름다움은 놓치기에 너무나 훌륭하거든요.” 라며 감동한다. 

비록 아무런 소유도 권리도 없지만 자연의 순수함에 점점 동화되어 가는 알렉스가 던지는 한마디


 “인간관계에서만 기쁨을 찾지 마세요. 신은 곳곳에 삶의 기쁨을 숨겨 두었으니까요.” 

나는 그 말에 숨이 막혔다. 

삶의 진정한 기쁨도 찾지 못하면서 그저 생존의 걱정에만 급급했던 내 삶의 편린들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영화의 말미는 인간적 관점에서는 비극으로 끝난다. 

독초를 오인해 먹은 알렉스가 알래스카의 버려진 폐차 안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는 죽음에 이르면서 마지막 글을 남긴다. 

그것은 ‘Happiness only real when shared(행복은 나눌 때 현실이 된다)’라는 글이었다. 

철저한 고독과 외로움 가운데 그는 인간의 행복은 결코 혼자가 아닌 

나눔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부조화와 불합리한 세상 가운데 인간을 피해 떠나온 자연 속에서 

그는 마침내 세상과 화해하며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지를 깨달으며 그의 짧은 생에 작별을 고한다. 

구름 사이로 내비치는 찬란한 빛을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로 세상을 떠나는 그의 모습은 

죽음이라는 비극을 넘어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새로운 명제를 던져준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일그러진 삶의 계획들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해도 

삶의 큰 그림 속에서는 무의미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바른 삶이고 의미 있는 것이었는지를 망각한 채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춘 삶은

말할 수 없이 저열한 것이었다. 

문득 세상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화려하게 사는 사람들에 비해 지극히 소박하게 살아가는 자신의 삶에 대한 

의구심을 말하던 한 지인이 생각났다. 

그 지인은 평범하지만 매일 자연과 교감하며 신의 은혜에 감사하며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간혹 아는 사람들의 성공이나 칭송, 업적의 소문이 들려올 때면 

마음의 소박함이 깨어지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는 마음에 들려온 신의 음성은 ‘자연 가운데 소박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사는 삶 

그 자체가 세상 그 어떤 삶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귀하고 존귀한 삶이다.’라는 것이었다.   

   

나는 새삼 은퇴 이후 경제적 염려에 휩싸였던 나 자신이 슬퍼졌다. 

나 자신의 지나온 삶이 너무 슬퍼서 한참을 홀로 울었다. 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는 내 핏줄을 따라 흐르는 피의 뜨거움과 순수한 근육의 힘으로 내 인생을 살아내지 못했다. 

지난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조직의 일원이거나 관리자로 사람을 부리고 

사람을 관리하면서 생활을 영위해온 것이었다. 

거기에 무슨 아름다운 가치가 있었을까? 

자연과 교감하지 못하면서, 생을 위해 정직한 땀방울도 흘리지 못한 채 사람 아래 서거나 

사람 위에 서거나 사람과의 관계, 관계, 관계에 부딪히며 살아온 세월이었다. 

그 관계 속에는 필연적으로 위선과 아첨과 거짓과 권모술수가 담겨있었다. 

삶의 진정한 깊이를 들여다보지 못하고 피상만을 핥으며 살았던 셈이다. 

나는 사회의 모순에 온몸으로 저항하며 짧은 생을 살았던 순수청년 알렉스 앞에 

내 지난 생이 한없이 초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한없이 슬펐다.     


‘인간의 진정한 꿈은 어디 있을까?’

‘인간이 진정으로 꿈꾸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나는 이제와 새삼 그 궁극적이고도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다 살아버리고 난 다음에야 말이다.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 

어떻게 돈을 벌고 저축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내 생의 황금기를 모두 보내버리고 난 다음에야 말이다. 

아! 이건 정말 너무나 서글픈 일이었다. 

이생의 삶이란 결국 한 번은 이별하게 되어있고 

우리 모두는 생의 모든 광휘로부터 한 번은 떠나기 마련인데 

무엇이 나의 발목을 붙잡았던 것일까? 무엇이 자연스러운 삶의 옷자락을 놓아주지 않았던 것일까? 

나는 해 질 녘 먼 하늘을 바라보며 일상의 덧없음에 한동안 젖어 옴짝할 수 없었다. 

이제 다시는 생활의 염려에 마음 기울이지 않으리라 마음을 다진다. 

자연 속에 서서 풀잎처럼 눕고 일어서며 햇살 하나, 바람 한 점, 

빗방울 하나에 감사하며 사랑하며 살 것이라고! 


모든 인간관계를 떠나 자연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모든 관계를 자연의 흐름과 순리 속에 남겨둘 것이다. 행복을 나눌 것이다. 

사람들과 그리고 자연의 일상들과 더불어 그렇게 소박한 날들을 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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