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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솔 Sep 23. 2022

이해할 수 없는 일들 앞에

산골 일기 삼십구 번째

2016년 8월 어느 날. 노르웨이 북부 하르당에르비다 국립공원에는 폭우와 함께 벼락이 내리치는 험한 날씨였다. 그 폭우와 번개에 놀란 순록들은 서로 몸을 붙이며 두려움을 이겨내고 있었다. 그런데 젖은 땅에 내리친 번개가 물기를 타고 순록에 연결되며 순식간에 323마리의 순록이 감전되는 비극이 발생하고 말았다. 그곳은 일 년 평균 기온이 10도 이하인 툰드라 지역으로 순록들에게는 천국과 같은 곳이었다.     


갑자기 323마리의 순록이 떼죽음을 당하자 공원 관계자들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한 상황에 

놓였다. 지역 주민들은 당연히 사체로 인한 악취와 설치류의 증가를 우려하며 당장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공원 관계자들은 숱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사체들을 그대로 방치하기로 결정했다. 자연에서 

일어난 일이니 자연이 그 사체들을 처리할 수 있도록 개입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자연의 순리를 믿어보기로 한 것이다. 공원 측은 자신들의 결정대로 순록의 사체를 그대로 방치하였다. 그리고 4년이 흐른 이후 공원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시체를 먹기 위해 날아온 육식 조류들과 설치류를 잡아먹기 위해 등장한 여우로 

인해 우려했던 설치류의 증가는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곳에 등장한 여우와 까마귀 배설물에 들어 있던 검은 시로미라고 불리는 식물이 번식하게 되면서 초식 동물을 불러오고 초식동물들은 다시 

육식동물들을 불러들이면서 생태계가 복원된 것이다. 그 놀라운 변화의 과정을 매일 지켜본 노르웨이 대학교의  셰인 프랭크 교수는 방치된 순록으로 인해  이듬해인 2017년부터 오히려 조류나 육식동물, 그리고 식물 종들이 오히려 증가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였다. 그는 순록 무리의 떼죽음이라는 비극이 어떻게 자연을 

새롭게 소생시키는지 그 과정을 통해 삶과 죽음을 넘어 자연이 만들어가는 일에 경이를 느꼈다고 말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세상의 일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해 깊은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던 때는 마침 풀리지 않는 문제로 인해 근심이 가득하던 때였다.    

  

’왜 하필 나만 이런 고통의 짐을 져야 하는가!’ 

‘왜 이토록 어려운 일들이 내게 생긴 것일까?’

‘내 힘으로는 불가능한 이 난관을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분명 좋은 일이라고 정의로운 일이라고 시작한 일이 큰 난관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일을 추진하면서 부딪는 불가항력적인 어려움들이 거대한 벽처럼 나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이한 순록 떼가 만들어낸 4년의 기적 이야기는 머릿속을 번갯불로 내리친 듯 나를 새롭게 일깨워 주었다. 

누가 봐도 비극이었던 일이, 주검의 어두운 그림자만 가득했던 일이 새로운 생명을 부활시키는 요람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비극적으로 죽은 순록 떼가 만들어낸 경이는 내게 시간의 길이를 어떻게 보고 해석해야 하는지를 알게 해 주었다.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고난과 역경에 대해서도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 깨닫게 해 주었다. 우리가 시간이나 사건을 바라보는 프레임을 좁게 가져갈수록 그 시간이나 사건이 지닌 의미에 대해 근시안적 해석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의 이성과 감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한 상황을 맞이하곤 한다. 말로 설명이 되지 않는 비극을 만나기도 하고 그 무엇으로도 해석할 수 없는 어려움과 고통을 맞이하기도 한다. 지금도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병동의 환자들이 어떤 심정인지 헤아려보라! 

그 누구도 자신의 병이 자신에게 올 줄 몰랐을 것이고 왜 그 병이 자신에게 왔는지 해석도 안 될 것이다. 

그 풀리지 않는 의문 속에 고통하는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내게도 알 수 없는 작은 고질병이 하나 있다. 

아무리 약을 먹어도 재발하고 재발하는 악순환 속에 ‘왜 하필 접니까? “라는 절규가 터져 나오곤 했다. 

폭우와 번개에 대한 두려움으로 서로 엉켜있었던 그 순록 떼는 자신들이 맞이할 운명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었을까? 동 시간에서 바라보면 그 순록 무리는 영문도 모르게 죽어버린 이유 없는 비극의 주인공에 불과하다. 불가해하게 밀어닥친 돌발적인 비극 외에 달리 해석할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을까? 하지만 순록 떼의 죽음 이후 4년의 시간이라는 프레임으로 보면 순록의 죽음은 결코 단순한 비극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죽음을 토대로 새로운 생명이 움돋고 죽어있던 땅이 새롭게 태어나는 순환의 과정이 되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비극과 이별도 같은 것이 아닐까? 당장 겪는 순간에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그로 인한 분노가 치밀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그런 고통과 비극 속에도 분명한 뜻이 있으리라. 지금 내가 겪는 고난과 어려움이 먼 훗날 어떤 아름다운 꽃을 피워낼지 그 누가 알겠는가! 나는 그런 마음으로 내게 닥쳐오는 험한 파도들을 바라본다. 그 파도가 만들어낼 새로운 이야기들이 어쩌면 내 당대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내 상상보다 더 긴 세월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조금 더 담담하게 삶의 시간을 걸어가야겠다. 작은 파도에 일희일비하며 삶의 행과 불행을 저울질하지 말아야겠다. 슬픈 일을 당해 슬퍼할지라도 좌절하지 않으며, 기쁜 일을 만나 누리더라도 우쭐대지 말아야겠다. 더 멀리 보고 더 깊게 보는 평상심으로 마음의 부침을 이겨내야겠다. 섣불리 평가하는 경박함을 벗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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