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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솔 Jul 14. 2022

수탉의 비애

산골 일기 여덟 번째

“우리 닭 한번 묵자”

“갑자기 뭔 닭이요?”

“닭 잡아 묵을 일이 생깄다”     


뜬금없이 닭을 잡아 잔치 한 번 하자는 마을 형님의 말이었다. 

그 형님은 신선한 계란을 얻을 요량으로 십여 마리의 닭을 키우고 있었다. 

별로 많지 않은 닭을 키우고 있던 터라 갑자기 닭을 잡겠다는 말이 의아했다.      


“암탉에 비해 수놈이 너무 많아서 한 놈이 암탉에게 달려들면 

딴 놈들이 방해를 해 싸서 알을 제대로 못 낳는다 아이가”     


문제는 십여 마리 닭 중에 수탉이 다섯 마리나 돼서 서로 암탉을 차지하려는 경쟁 때문에

 암탉은 암탉대로 수탉은 수탉대로 스트레스가 커서 달걀이 안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탉 한 마리만 남기고 네 마리를 잡기로 했단다. 

아닌 게 아니라 그동안 닭장 안이 수탉들 소리로 꽤나 시끄러웠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수탉에게 무슨 잘못이 있었겠는가! 

수탉 다섯 마리, 암탉 다섯 마리를 사서 넣어두면 사이좋게 일부일처로 살 줄 알았던 

그 형님의 순진한 생각이 문제 아니었겠는가! 

그런데 힘센 놈이 암탉을 모두 차지하며 혼인 질서가 깨지는 통에 

그동안 닭장 안은 바람 잘날 없는 전쟁터였던 것이다.      


그날 저녁 그렇게 수탉 네 마리가 비명횡사하여 푸짐한 저녁상이 되고 말았다. 

더불어 닭장 안에도 살아남은 수컷의 안도로 인해 조용한 평화가 찾아왔다. 

꼬추 달고 태어난 게 뭔 죄라고... 쯧쯧.      


비단 닭뿐이겠는가! 

자연계를 가만 살펴보면 수컷의 허세를 조금 덜어내고 나면 수컷의 삶이라는 것이 그리 넉넉하지가 않다. 

무리 지어 사는 대부분의 동물들은 승자독식의 원칙에 따라 가장 강한 수컷이 모든 암컷을 차지한다. 

자연히 경쟁에서 뒤처진 수컷들의 삶은 장가 한 번 못 가보고 초라하게 끝나버리기 마련이다. 

밀림의 제왕이라는 사자도 젊은 수컷에게 밀린 늙은 사자는 뜨거운 초원 위를 쓸쓸히 걷다가 

기진하여 굶어 죽는다. 

밀림의 제왕이면 뭐하나? 

내쳐진 수컷의 초라한 행색이라니!      


무리 지어 살지 않는 짐승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그 세계에서의 거의 모든 수컷들은 암컷보다 훨씬 화려하고 아름답다. 

특별히 새들의 세상에서 수컷들은 암컷에 비할  바 없이 화려한 깃털을 뽐낸다. 

꿩이나 공작이나 극락조를 보라. 구애를 위한 극락조의 형형색색의 깃털과 

앨버트로스의 황홀한 춤사위는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있다. 

하나의 암컷을 차지하기 위한 수컷들의 피나는 노력은 가상함을 넘어 눈물겨울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 짝을 구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수컷들이 즐비하다. 

어디 자연의 세계만 그런가! 

가축들의 세계에서도 예외가 없다. 

알을 낳은 암탉은 한 마리 한 마리가 소중하지만 수컷은 암컷들에게 고루 나눠줄 조그마한 정력이 필요할 뿐 자칫하면 사료나 축내는 식충이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그 정력마저 여의치 않으면 그만 벌거벗겨진 채로 저녁 식탁에 한 줌 먹거리로 올라가야 한다.  

    

여왕벌과 수태하여 건강한 종족을 이어가야 한다는 중차대한 사명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시간, 

없는 시간 다 바쳐 체력단련에 최선을 다하던 수벌들을 보라. 

수태에 성공한 단 한 놈을 빼고 다시 돌아왔을 때 그들 모두는 존재의 목적도 의미도 없는 식충이로 둔갑하여 죽임을 당하거나 온갖 멸시 천대를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 

그 수벌과 수탉의 운명이 다를 게 뭔가? 

아~ 서글픈 수컷들이여!     


오래된 농촌사회를 보면 대부분 모계사회였다. 

노동력을 생산해낼 수 있는 능력이 모계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모계사회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틈바구니에서 그나마 힘쓰는 일들을 담당하며 누렸던 남정네들의 지위는 

근현대에 들어서 농기계의 발달과 더불어 더욱 무색하게 되었다. 

남성의 전유물 같았던 힘을 이제는 남녀 구별 없이 누구나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경제 활동의 주체를 남성으로 국한하고 여성들을 집안 살림살이 전담으로 제한하였던 시대가 끝나고 

누구나 경제활동에 자유로워지면서 경제권에 따른 남성들의 우월권도 이제는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조금 남겨진 남성의 지위도 나이 들어가면서 확연하게 떨어지고 만다. 

경제활동을 내려놓고 은퇴하고 나면 대부분의 남정네들은 

소위 살아가는 기술이 전무한 벌판에 내려선 것과 다름없다. 

음식을 조리하고 옷을 세탁하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 초자 서툴러서 어리바리한 바보가 되고 만다. 

자식들도 자신들을 품에 안아 주었던 엄마는 그리워 하지만 

밖으로 싸돌아만 다녔던 아버지를 그리 애틋해하지 않는다. 

그동안 너희들 먹여 살리느라 애썼잖아!라는 항변은 텅 빈 메아리가 되어 흩어질 뿐이다. 

그래서 늙은 사자처럼 남자들의 늘그막은 때로 억울하고 때로 회한만 가득하다. 

남자의 노년이 그리 즐겁고 행복한 구도가 아닌 것이다.     


나는 식탁에 오른 수탉들을 뜯으며 어쩔 수 없이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나이 들어 수탉의 비애를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을 아무리 이리저리 굴려 봐도 유일하게 내 곁을 지켜주는 아내를 꽉 붙잡는 수밖에 

다른 수가 없어 보인다. 

식탁 건너편에서 닭 날개 하나를 뜯고 있는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제는 늙어 예전의 매력이 모두 사라졌다 해도 내 모든 행복의 열쇠를 쥔 것은 저 여인 밖에 없다.

      

만일 암탉들이 말을 할 수 있었다면 닭을 잡전 형님에게

 ‘저 수컷만은 잡지 말아 주세요!’라고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수탉이 있지 않았을까? 

바로 그 수탉 같은 남자!     


“난 뭐니 뭐니 해도 느그 아버지가 제일 좋아야”

“당신이 곁에 있어줘서 든든해”     


이런 말을 들으며 살아야지 하는 다짐을 다시 한번 다져본다. 

닭을 잡아주던 형님은 평소 전형적인 시골 아저씨의 무뚝뚝함으로 아내를 윽박지르는 일이 많았는데 

어느 날 아내의 건강이 심각해진 것을 알고 나서 사람이 변했다. 

그 형님은 그때 생전 처음으로 처음으로 아내가 없다면?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물었단다. 

그리고 이내 아내가 없는 세상의 적막함과 회색 빛 암담함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단다. 

그날 이후로 우리가 농담 삼아 ‘우리 형님이 달라졌어요’라고 놀릴 만큼 형님은 소문난 애처가가 되었다.      

그렇다. 항상 놓치지 말아야 할 질문이 있다. 

‘어떤 세월을 살았든 내 곁의 바로 사람이 영원히 떠나버린다면... “  

이 질문의 해답이 선명해지거들랑 결코 그 해답을 잊지 말고 꼭 붙잡으시라.

 ’ 내가 어떻게 가장의 짐을 어깨에 지고 견디고 버텨왔는데!‘ 그런 생각일랑 

마음의 서랍 깊이 묻어 두고 다시는 꺼내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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