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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솔 Sep 07. 2022

아는 거 많은 거 봉께 고생 많이 하셨네

산골 일기 서른두 번째

”피망 키워서 피멍 들고, 그다음 해에 상추 키워서 상처 입었다 아이가. “

”아이고 형님! 그기 재산이오. 그 경험이 나중에 큰 힘이 된다카이. 형님이 아는 게 많은 거 봉께 고생 많이 

하셨네. 하하. “     


그들의 대화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실패로 끝난 농사일이 무척이나 고됐을 텐데 그 아픔마저 

해학으로 풀어내는 그들의 여유가 대견해 보였다. 오랜만에 들른 시골 식당 옆 테이블에는 고된 농사일을 마친 농부들의 이야기로 왁자했다.      


시골에 와서 보니 농사로 생활을 영위한다는 것이 일부 대농을 빼고는 불가한 현실임을 여실히 깨닫게 된다. 더불어 농작물이 농부의 발자국 소릴 먹고 자란다는 소리가 함부로 뱉을 말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부지런한 농부가 좋은 채소를 만든다는 채찍의 말이 일견 맞는 말 같지만 농사의 고단함을 생각하면 무지한 사람들의 사치스러운 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푸른 채소들은 부지런함과 상관없이 농부의 땀과 노고가 묻어 있다. 때로는 진하디 진한 눈물이 담겨 있다. 수확을 눈앞에 두고 탄저병으로 물러진 밭작물들, 예기치 않은 냉해로 상품성을 잃어버린 과일들의 이야기는 시골에서 일상처럼 넘친다. 그리고 그런 병충해나 재해로 인한 보상은 재해보험이라도 들지 않는 한 수고를 다한 농부에게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꼭 병충해나 자연재해가 아니더라도 과잉생산으로 인한 가격 폭락은 한 여름 내내 흘린 땀방울을 허무한 빈손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래도 농부들은 땅에 들붙어 악착같이 희망을 붙잡는다. 그들의 분투는 옆에서 지켜보면 눈물 나는 일이다. 당연스럽게 시골 살이를 하면서 채소나 과일값만은 절대 깎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내대신 수고해 준 그 손길과 정성이 고마워 물건 값을 흥정하는 것이 농부를 모독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돈만 생각하면 그 누구도 농사지을 생각이 안 날 것이다. 시골에 농사라고 할 것도 없는 손바닥 만한 텃밭 

하나와 과실수 몇 그루를 키워보니 농부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뜨락 한편에 외롭게 서있는 대추나무는 올해 ‘대추나무에 연 걸렸네.’라는 표현이 딱 맞을 만큼 열매를 주렁주렁 달았다. 그 곁에 애기사과나무도 이삼십 개의 발그레한 사과를 매달았다. 매일 붉어지는 과일을 바라보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농부들에게는 발품을 팔아 지극정성으로 키운 채소며 과일들이 자식 같은 마음이다. 돈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 자기 손으로 키운 그 튼실한 열매들이 어여쁜 것이다. 그런 뿌듯한 마음이 농부의 마음이다.   

      

”이번 태풍이 지나고 나면 과일이 다 떨어지고 없을 텐데 애들 와서 사과를 따면 어떨까? “  

   

아내는 뜨락에 열린 열매들을 바라보며 손주들이 수확의 기쁨을 누렸으면 했다. 볼품없던 작은 나무에서 과실이 주렁주렁 맺히는 경이로운 세계를 경험시키고 싶어 했다. 제 손으로 과실을 따서 맛보는 즐거움이 손주들에게는 큰 선물일 것이다. 해맑게 웃으면서 뜨락으로 달려 나간 손주들이 한 광주리 사과를 따왔다. 농약은 

물론 비료조차 제대로 주지 못했는데 아낌없이 과일을 내어준 나무가 고마웠다. 척박한 땅이었는데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았을까? 나무들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서있지만 조용히 잎새를 틔우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다. 아낌없이 내어주고 또다시 내년을 기약하며 줄기가 굵어진다. 작은 공과라도 널리 알려야 직성이 풀리는 공명심에 휘둘렸던 날들을 생각해 보면 가만히 열매를 내어주는 나무 앞에 

한없이 부끄러운 마음이다.      


시골 살면서 조금씩 풀과 나무를 알아간다. 모두가 햇빛을 좋아하지 않는다. 모두가 듬뿍 부어진 물을 반가워하지 않는다. 모두가 기름진 토양을 반기지도 않는다. 풀과 나무들은 닮은 듯 닮지 않았다. 풀과 나무를 사랑하는 일은 그 풀과 나무의 속내를 헤아려 이해하는 일이다. 천지를 덮는 메뚜기 떼가 번성의 축복이 아니라 

재앙인 것처럼 득세하여 우거진 화초도 좋은 일이 아니다. 서로 부대끼며 썩어버린 안개꽃 무리를 보면서 진즉에 솎아주지 못한 것을 얼마나 후회했던가! 농부들도 한 해 두 해 흙에 잔뼈가 굵어가며 풀과 나무의 이야기를 이해한다. 피망을 키우다가 피멍이 들기도 하고 상추를 키우다가 상처를 입기도 하면서 나무가 되고 풀이 

되어 간다. 소박한 삶의 그림을 완성해 간다.     


그런 농부들을 바라보며 나는 언제나 제 값 받는 기쁨에 겨운 농부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허허 농사지을 맛이 나네. “     

 아무리 작고 연약한 작물이라도 출하하는 날이면 꼭 딸 시집보내는 기분이라는 농부들의 소박한 웃음소리를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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