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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솔 Sep 08. 2022

가스 라이팅

산골 일기 서른세 번째

”온 세상이 다 아는데 젊은 사람이 어찌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르나? 쯧쯧... “     


주변에 태극기 부대 할아버지가 계셨다. 주말이 멀다 하고 남대문까지 올라가 태극기 집회를 하고 내려오신다. 비록 나이가 들었어도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 온 힘을 다해 죽어라 애국하고 내려오는 그의 얼굴은 항상 자랑스러움과 뿌듯함으로 가득했다. 반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모르는 우리의 어리석음이 그에게 얼마나 한심했는지... 거의 종일 극우 방송에 심취해 있는 그의 세계는 그와 다른 세계를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이 되어 그를 더욱 고립시켜 나갔다. 문제는 그 스스로 자신이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할아버지는 오히려 늙은 자신까지도 아는 세상 돌아가는 비밀을 어찌 사람들이 모르는지 의아해하며 답답해했다. 그 할아버지의 삶의 세계는 소위 음모론이 만든 가상의 공간이 전부였다. 그 누구도 그곳에서 그를 

꺼낼 수 없었다. 그를 꺼내려는 모든 어리석은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 돌아가는 비밀의 진리를 아는 그의 현명함을 이길 수 있겠는가!       


인간의 뇌가 가스 라이팅에 의해 세뇌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다. 세뇌된 사람들의 편향된 언변과 행동들은 나를 더욱 놀라게 한다. 명백한 진실과 사실 앞에서도 전혀 자기 생각을 굽히지 않는 그 왜곡된 믿음과 고집스러움에는 백약이 무효하다. 그래서 때로 나는 나 자신이 두렵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하는 편향이 깊어지면 나 또한 왜곡된 안경을 쓸 수 있기에 그렇다.      


최근에 ‘돌나라한농복구회’라는 사이비 종교 이야기를 탄식하며 들었다. 어린아이들이 네 명이나 사고로 

죽었는데 신에게 드려진 거룩한 제물이었다는 그들의 주장이 황당함을 넘어 나를 경악하게 하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교주라는 사람이 스스로 신이 되어 자신과 관계하여 새로운 예수를 낳아야 한다는 교리로 그 종교 

안에 속한 여성들을 마음껏 유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교리에 세뇌된 여성들은 모두가 

자발적인 마음으로 그의 욕망의 희생자가 되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교주가 자신들을 위해 정력을 

희생하고 있다는 그들의 인터뷰는 귀를 의심하게 할 지경이었다. 그곳의 어린아이들은 유치원 시절부터 낭군님(교주)의 신부가 될 것이다 라는 동요를 부르며 성장하고 있었다. 세뇌된 남편들은 자신의 아내가 교주의 

신성한 의식에 동원되는 것을 오히려 영광스러운 일로 여겼다. 이 대명천지에 버젓이 일어나는 이일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우리 인간의 정신이라는 것이 세뇌에 따라 종속되고 왜곡될 수 나약한 것이라는 사실에 소름이 돋는다.


어디 그들뿐이랴? 지금 대한민국은 어쩌면 거의 모든 국민들이 집단 가스 라이팅을 당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갈수록 양극화는 심해지고 편향된 인터넷 방송들은 알고리즘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점점 더 왜곡과 편향의 깊은 골짜기로 끌고 간다. 그래서 좁아진 자신만의 의식 세계 속에서 세상을 판단하고 재단하며 자신들만을 추종하는 군중을 만들어 간다. 시사뉴스에 등장하는 여야의 패널들을 보면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만큼 개탄스럽다. 명백한 사실 앞에서도 내편 문화에 빠져 궤변을 늘어놓거나 앞뒤가 맞지 않는 변론을 일삼는다. 내편은 무조건 옳고 상대편은 무조건 나쁘다는 이분법이 사람들의 영혼을 좀먹고 진실에 눈멀게 한다. 마치 세뇌된 인간처럼, 양심에 화인 맞은 인간처럼 뻔뻔한 주장들을 펼치는 정치인들을 보면 탄식만 나온다. 잘못된 것은 제 편이라도 잘못되었다고 말할 용기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잘못되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것인지 그들의 속내를 모르겠다. 차라리 용기가 없는 것이라면 그나마 다행이겠다. 만일 인식조차 못하는 것이라면 그들의 편향성으로 인한 폐해를 국민들이 고스란히 떠안아야 할 테니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상식에 어긋나는 일에 ‘잘못되었습니다.’ 그 한마디 말을 건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그런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상식 밖의 댓글들을 보면 더욱더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는 것만 같다. 


”나와 다른 정당이지만 그 정책은 참 멋지네요. “

”우리와 정책은 다르지만 추진하는 방식이 참 좋습니다. “ 

나와 다른 소속일지라도 그 정책이나 주장이 정의로운가? 보편적인 이치에 맞는가? 생각해 보고 자기 양심이 지르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위정자들을 정녕 만날 수는 없는 것일까? 매일 자기주장만을 되풀이하며 정쟁을 일삼는 정치의 현실이 한심하다. 그런 인물들을 뽑을 수밖에 없는 현실은 더욱 서글프다.    

   

하지만 누구를 탓하랴? 먼저는 나 자신부터 돌아봐야 할 것이다. 싫어하는 뉴스나 반대편의 이야기에는 죽어라고 귀를 막는 그릇된 습관부터 고치고 볼 일이다. 비록 고통스럽더라도 반대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편향이 아닌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려 애써야 한다. 비록 내편이라도 그릇된 것이 있으면 잘못되었다고 비판할 줄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의 비판에 대해서도 비논적인 맞대응에 앞서 자신을 점검하고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나와 다른 생각에 대해 무조건적인 거부부터 하고 보는 어리석은 감정적 반응을 자제해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 나는 스스로 네 가지 기준을 정해서 실천해 보기로 했다. 스스로 삼가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세간의 그릇된 논리에 세뇌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첫째는 지금 내 말과 행동은 진실한 것인가? 

둘째는 지금 내 말과 행동은 선한 양심인가? 

셋째는 지금 내 말과 행동은 깨끗한 것인가? 

넷째는 지금 내 말과 행동은 더 좋은 미래를 위한 것인가? 

       단지 또 다른 논쟁을 만들려는 억지인가?      


이 네 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그 해답을 통해 말하고 행동해 보기로 한다. 

왜곡된 말과 행동으로 보내기에는 내 인생의 한 세월이 너무 아까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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