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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솔 Jul 12. 2022

트롯 아줌마

산골 일기 다섯 번째 

얼마 전부터 마을 산책길에 트롯을 목청껏 부르며 걷는 아주머니를 마주친다. 

데면데면 인사를 나누며 지나치던 어느 날 드디어 대화의 물꼬를 텄다.      


”아이고! 목청도 좋으시네. 노래 좋아 하시나 봐요? “

나의 물음에 그 아주머니가 의외의 대답을 들려주었다. 

”내가 이리 소리라도 안 지르면 미쳐쁜다 아이요 “     


그렇게 마주 서서 저간의 사정을 들어보니 아주머니는 치매가 든 노모를 모시고 있었다. 

말과 뜻이 통하지 않는 치매 노모를 수발하다가 견딜 수 없는 울화가 치밀면 

그만 산길로 달려 나와 악다구니로 소리소리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그러고 나면 다시 견디고 버틸 힘이 생긴단다. 

그저 활달한 분이구나 라는 생각만 했었는데 사연을 듣고 나니 마음이 애잔해졌다. 

그 뒤로 트롯을 흥얼거리며 마을로 내려가는 아주머니의 뒷모습이 한없이 쓸쓸하면서도 커 보였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의 노래를 제대로 들을 기회가 왔다. 

아내와 산책길에 나섰다가 길섶에 앉아 쉬고 있는데 

멀리서 트롯 한 자락을 흥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주머니의 실루엣이 보였다.


”멀리 서도 쩌렁쩌렁하니 목청이 좋으십니다. “

”나물이라도 캐러 나오셨나 보네요? “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주고받고는 대뜸 염치없는 부탁을 했다.

”노동요라 생각하고 고마 한 곡조 제대로 한 번 뽑아 주이소.“

그러자 아주머니는 지체 없이 선뜻 대답했다.

”그랄 까예. “     


고즈넉한 산자락에 앉아 아주머니가 들려준 노래는 ‘나이가 든다는 게 화가 나’라는 노래였다. 

처음에는 알지 못하는 노래였는데 돌아와 찾아보니 그 노래였다. 


나이가 든다는 게 화가 나

늙어간다는 게 창피한 일도 아닌데

저 멀리 지는 석양과 닮아서 마음이 서글퍼

외로움에 지쳐도 웃어버릴 그런 나이야       


왜였을까? 가만히 노래를 듣는데 눈물이 났다. 

생각해 보니 나이가 든다는 게 정말 화가 난다. 

이곳저곳 예전 같지 않은 몸의 어눌함, 쭈글쭈글해지고 굽어지는 피부와 허리를 생각하면

 ‘청춘이 엊그제 같은데 언제 이리 나이가 들었나?’ 싶다. 


”어른들 수발들다 보니 이리 다 늙어 버렸네요.

 곱던 청춘은 어디로 다 가버렸는지 이렇게 쓸쓸한 날만 남았소. “       


노래를 다 부르고 난 아주머니는 서늘한 한마디 말을 남기고 휘적휘적 마을로 내려갔다. 

노래 가사가 그래서였는지 함께 계시던 어르신 한 분이 큰 한숨을 내쉬었다.   

   

”요 아래 갑장도 지난해 세상을 떠버렸고, 앞 마을 친구도 올 초에 세상 떠나고 이제 나만 남았어. 

인생이 한순간이라 “     

”나이가 스물이면 세월이 시속 이십 킬로로 가고 

나이가 일흔이면 칠십 킬로로 간다 카더니 그 말이 딱 맞다. “      


뒷산 산책길이 갑자기 인생무상의 무대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결론은 세월이 이리 무상하니 사는 동안만이라도 잘 살아야 한다는 긍정의 다짐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인생에 무슨 거창한 철학이 필요하겠는가? 

순리를 따라 사랑하고 용서하면 그만 아닐까? 

어차피 짊어지고 갈 것 아니고 다 두고 갈 것이니 괜한 욕심부리지 말고, 

내 것, 네 것 집착하지 말고 툴툴 털며 살면 그만 아니겠는가!     


동일하게 치매 엄마를 수발하고 있는 아내에게는 그 아주머니의 모습이 동병상련의 아픔이었을 것이다. 

수십 번 반복되는 질문과 역정의 되돌이표를 견뎌내야 하는 것이 옆에서 보기에도 만만치 않는데 

그 감정의 격랑 속에 혹여 아내의 마음에 병이라도 들까 걱정스럽다. 

고단한 삶 속에 부쩍 늙은 아내가 유난히 마음에 밟힌다. 

하지만 늙은 아내는 오히려 나의 늙음을 걱정해 준다. 

늙어간다는 것에 대해 유난히 쓸쓸해하는 내 기분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나이 든다는 게 화가 나’라는 노래 가사가 아니더라도 요즘 들어 늙어간다는 것이 

당연한 순리로 여겨지지 않고 젊음의 회한이라도 된 듯 마음을 틀어쥐곤 도무지 놓지 않으려 한다. 

덧없는 날들을 묵묵히 받아들이다가도 어느 순간 삐죽 튀어나오는 애잔한 감정을 주체하기 어렵다. 

그래서일까? 

요즘 나도 생전에 모르던 트롯을 읊조리는 날이 잦아졌다. 

더불어 눈가에 눈물도 많아졌다.         


나이 들어 소위 무엇이 되겠다는 꿈은 사라졌지만 한 가지 소원이 생겼다. 

치매 노인으로 남겨지지 않는 일이다. 

그 트롯 아주머니를 만나고 나서 더욱 간절한 마음이 되었다. 

나로 인해 소리라도 질러야 살 것 같은 고통을 안고 산길을 걷는 내 자식들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언제 바람이 들었는지 모를 만큼 순식간에 그친 저 대숲의 바람처럼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스치듯 여생을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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