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푸른솔 Sep 02. 2022

견뎌낸 오늘이 내일을 만드는 거야

산골 일기 서른 번째

  밤을 뒤척이며 잠을 못 이루는 작은 불면증이 생겼다. 라벤더 향을 적신 향주머니를 베개 안에 넣어두고 

잠을 청해 보지만 한밤중에 깨이고 나면 좀체 다시 잠을 이루기 어렵다. 그런 밤이면 밀쳐 두었던 삶의 걱정

거리들도 함께 깨어나 불면의 밤을 수만 가지 잔걱정으로 붙잡고 늘어진다. 울울한 생각들이 마음 밭에 우후죽순처럼 돋아 그 날카로운 창끝으로 마음을 찔러댄다. 늙는다는 것이 그런 것인가 보다. 할 일을 모두 끝낸 홀가분함보다는 아직 이별하지 못한 미망의 날들이 우후죽순이다.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무념무상의 경지는 속세를 떠나지 않는 한 너무 높은 곳에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젊음이 사라진 빈자리엔 그렇게 당연한 일처럼 불면증이 자리 잡았다. 새벽 미명부터 잠을 깨워 “할머니는 잠도 없나?” 하며 투덜댔던 오랜 기억들이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 짓게 한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이 모든 일에 달관이 되는 장점도 있지만 동시에 조금씩 저하되는 체력으로 인한 걱정거리는 물론 이별해야 할 일들이 많아지는 쓸쓸함도 있다. 연로하신 부모님과의 이별도 그리 멀지 않고, 열정과 패기로 도전하던 일들은 이제 다시 엄두가 안 날 정도로 멀어져 있다. 별다른 무기도 없이 살아내야 할 앞날은 때로 막막한 부담이 되어 돌덩이로 얹힌다. 그런 밤이면 불면의 끝자락을 붙잡고 간절한 기도를 반복하곤 했다.


 ‘이 근심과 걱정의 습관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그런데 지난밤에는 이런저런 생각 끝에 문득 뒷산의 어둠 속에서 이 밤을 나고 있을 수많은 생명들이 떠올랐다. 며칠 전 보았던 어린 부엉이는 이 쓸쓸한 밤을 어느 나뭇가지, 어느 둥지에서 나고 있을까? 숲을 가로질러 달리던 그 고라니는 어느 척박한 덤불 속에 몸을 누이고 있을까? 때 이르게 만났던 풀벌레들은 어느 잎새 

아래 고단한 몸을 숨기고 있을까? 자연 속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은 내일을 알 수 없는 불확실성 속에서 

하루하루를 분투하며 살아간다. 그곳에는 내일의 장밋빛 보장이 조금도 없다. 내일 입을 옷이나, 내일 누울 

잠자리나, 내일 먹어야 할 먹거리가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그 불확실성 속에 아무것도 갖춰지지

 않았지만 자연 속의 생명들은 매일의 척박한 일상을 그저 묵묵히 견뎌내고 살아낸다. 나름대로 내일을 갈무리하면서도 항상 내일의 걱정거리에 붙잡혀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에 비해 자연 속을 살아가는 생명들은 그 숙명의 굴레 아래 자신의 생애를 담담하게, 치열하게 살아낸다.    

  

나는 그 밤에 내 모습이 불편한 밤을 마다치 않고 다시 내일을 기다리는 한낱 미물만도 못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다시 이 밥을 먹을 수 있고 내일 다시 이 잠자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여유에도 불구하고 감사의 마음이 없었구나 싶어 부끄러웠다. 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인생의 수많은 시간들을 지나치고 나면 잊힐 걱정거리에 붙잡혀 부질없는 시간만 낭비하며 살아온 것 같다. 그 낭비 속에 입은 정서적 손상은 또 얼마나 

깊은 상처로 남겨졌던가!      


불면의 어둠이 가고 밝아온 아침. 이곳 산속의 공기는 투명하고 먼데 수풀의 녹음은 한껏 짙어졌다. 

그토록 불편하고 불확실한 수만 가지 이유 속에서도 수풀은 결국 짙어지고 그 속에 깃든 생명들은 더욱 풍성해진다. 자연은 불확실함을 넘어 때로는 부당하기까지 한 내일을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살아내려는 의지로 

충만하다. 나는 그 자연을 바라보며 지난밤 불면으로 뒤척이던 걱정거리들과 머지않아 닥쳐올지도 모를 모든 이별들을 담담히 기다리는 마음의 여유를 얻는다. 더 나아가 깊은 실망과 절망까지도 가만히 엎드려 기다릴 줄 아는 숙명을 기꺼이 받아들일 의지를 얻는다.      


잔 근심과 걱정으로 뒤척이는 밤. 저토록 캄캄한 수풀 속에서 조용히 내일을 기다리고 있을 미물들의 두근거림이 나를 일깨운다. 오늘 하루치 행복이면 어떤가! 내일은 정말 내일의 해가 뜰 것이다. 

행이든 불행이든 묵묵히 견뎌낸 사람만이 꺾이지 않은 꽃송이가 될 것이다. 


이전 28화 화이부동, 동이불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