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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솔 Oct 06. 2022

화이부동, 동이불화

산골 일기 사십팔 번째

공자의 논어 중 자로 편에는 군자는 ’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배는 동이불화(同而不和) 한다.‘라는 구절이 실려 있다. 말을 풀어보면 군자는 비록 함께 하지는 않더라도 자기와 다른 생각에도 화합하고 조화하지만 소인배는 자기편만 인정하고 그 외의 것과는 전혀 화합하지 않는 옹졸한 마음이라는 것이다. 동류가 되어 

우르르 몰려다니지는 않지만 상대방이라 할지라도 나와 다른 생각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 군자라는 것이다. 나는 공자의 통찰력에 동의한다. 현실적으로 그런 군자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말이다.      


나는 모든 정치인들이 공자의 이 말을 그 어떤 말보다 자신의 금과옥조로 삼았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소위 ’ 내편 문화‘가 망쳐 놓은 그림이 얼마나 많은지 살펴보라. 방탄국회라는 신조어가 생길 만큼 

내편이 범죄를 저질러도 내편이니까 감싸는 일들이 국회에서 얼마나 비일비재했는가! 그저 상대방을 깎아내리기 바빠서 상대가 아무리 좋은 정책을 들고 나와도 흠집 내기에만 혈안이 되어 결국 수포화된 정책은 또 

얼마나 많은가!  ’ 내편 문화‘가 작동하기 시작하는 순간 정의와 공평의 정신은 아득히 사라지고 만다. 내편이 정의가 되는 순간 세상의 그 어떤 정의도 정당한 것이 될 수 없다. 


학교에서 체벌을 받은 아이의 엄마는 자식의 부당함에는 장님이 되고 자신의 아이가 받은 체벌만을 항의하기에 혈안이 되어 후안무치가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그런 부모들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자신이 잘못했음에도 엄마라는 권력의 치마폭 뒤에 숨었던 아이들은 앞으로도 자신에 대한 반성 없이 힘 있는 자의 그늘에 숨는 일을 습관화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그늘 아래서 세상의 온갖 어둠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간혹 집권여당에서 “이번에 야당에서 매우 훌륭한 법안을 제안해 주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라던가 야당에서 “이번 정부의 조치는 서민들의 주름살을 펴준 좋은 정책이었습니다.”라는 덕담이 오고 가는 상상을 해본다. 정치적 이념을 가지고 치열하게 싸우다가도 보편타당한 정책에는 한 마음이 될 수 있는 그런 분별력과 화이부동의 정신을 생각하면 마음이 훈훈해진다. 내 생애에 그런 일이 있을까 싶지만 말이다. 이전투구에 빠져 상대방을 송곳으로 찔러대기 급급한 작금의 정치 현실이 부끄럽고 수치스럽기만 하다. 최고의 리더십들이 모였다는 곳이 저 모양이라니 인간의 근원적인 존엄마저 의심스러워진다.       


집단적 소속과 사안을 분리, 구별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시대다. 모두가 아는 이야기지만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볼테르는 ’ 나는 당신의 사상에 반대하지만 그 사상 때문에 탄압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편에 서서 싸울 것이다.‘라는 멋진 말을 남겼다. 집단의 이념이 나를 정의하기 시작하면 내 정신이 왜곡되고 만다. 독일을 부강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선출한 히틀러가 결정한 것은 모두 정당하다는 독일인들의 집단 

무의식은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는 만행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내편 지도자가 하는 일이니 모두 정당하다는 집단 논리가 독일인의 양심을 마비시킨 것이다. 인간도살자로 악명이 높았던 아이히만은 재판 중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나는 그저 상부에서 시키는 대로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 말했다. 그는 결코 자신이 하는 일이 인간의 보편적인 양심에 비추어 옳지 않은 일이라고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시골 마을에 집을 짓고 들어오면서 마을의 기존 시설을 활용해야 하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어려움에 봉착하곤 했었다. 마을 관정을 이용하거나 하수도를 이용하는 일에는 항상 몇몇 주민들의 몽니가 있었다 하지만 마을의 그 누구도 내 편이 되어주지는 않았다. 평소에 “젊은 사람들이 마을에 들어온다니 환영하네. 무엇이든 도움이 필요하면 얘기해 주게.” 하던 분들은 모두 어디에 숨었는지 나타나지 않았다. 함께 살아온 마을의 오랜 주민의 편에 설 수밖에 없는 것은 이해가 되었지만 결국은 안으로 굽고 마는 팔을 어쩔 수 없었다. 언제나 묵시적 동이불화(同而不和)로 인해 결국 마을의 공유자원을 활용하는 일은 항상 벽에 부딪는 것처럼 어려웠다.    

  

공자의 화이부동(和而不同) 정신을 서양에서는 똘레랑스(tolerantia)로 이해하기도 한다. 똘레랑스란 나와 다른 종교, 종파의 입장과 권리를 이해하고 관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선진국의 의미를 그 나라에 똘레랑스가 있느냐 없느냐로 판단하고 이해한다. 그런 차원에서 다른 종교를 철저히 배격하고 핍박하며 허용하지 않은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들은 절대 선진국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신교와 구교 싸움으로 서로의 가슴에 총질하는 나라들도 선진국일 수 없다. 진정한 똘레랑스란 내가 옳고 정당하기 때문에 네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옳다 믿는 것을 네가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 진정한 기독교인들은 타 종교인들을 지옥의 불쏘시개로 여기지 않고 구원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기며 섬기는 것이다. 나와 다르다 해서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오히려 관용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사실 다름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지상에서 에베레스트 산을 바라보면 그 높이를 가늠할 수도 없지만 달에서 직은 지구의 모습 어디에도 에베레스트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둥글고 매끄러운 모습뿐이었다.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가진 차이라는 것이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 일뿐이다. 다름과 차이를 관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보이저 1호가 찍어 보낸 우주의 먼지와 같이 작은 점 지구를 바라보며 “우리는 저 작은 점의 한 곳을 차지하기 위해 피의 강을 이루는 역사를 살았다.”라고 했던 칼 세이건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내가 비록 그대와 길을 함께 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대의 의견은 존중받아야 마땅한 좋은 의견이었소.”

“그대가 비록 내 편에 서 주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대의 의견에 동의하오.”


정의냐 부정이냐의 문제만 아니라면, 보편적인 양심에 옳은 일이냐 그른 일이냐 하는 사안만 아니라면 나는 그 누구와도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싶다.     


그러니 그대들 내편들이여! 

내가 비록 그대 편이 아닐지라도 부디 나를 용서해 주시게.

나 또한 그대들이 나를 떠난 서운함을 모두 안고 가겠네. 

때로는 함께 걷지 못한다 하더라도 섭섭해하지 말게.

비록 생각이 다르다 해도 그대들은 나의 영원한 벗이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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