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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솔 Aug 12. 2022

운명 속에 담긴 얼굴의 선한 표정을 따라가면

산골 일기 열여섯 번째

 “어르신 뭐하고 계세요? 과수원이라도 넓히시나 봐요?”

“아이다. 내가 묻힐 묫자리 만들고 있다 아이가”    

 

뒷산 등산길 초입에서 만난 마을 어르신의 대답이었다. 

올해 팔십이지만 반나절 산행이 거뜬할 정도로 정정한 어르신께서 

큰 나무들을 베어내고 잡목들을 정리하고 계셨다. 

무얼 하시나 궁금해서 물었더니 당신의 묫자리를 미리 정리해두고 있다는 말씀이었다. 자신의 형님이 묻힐 묫자리는 이미 빈 무덤에 뗏장까지 올려 다듬어 놓았는데 

자신도 이제 세상 떠날 준비를 해둘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미리 준비하는 어르신의 분주한 모습에서

삶의 덧없는 쓸쓸함이 묻어났다.

      

“아이고 어르신! 앞으로도 이십 년은 끄떡없어 보이는데 무슨 묫자리예요? 

백세 인생인데...”

“오는 순서는 있어도 가는 데는 순서 없다 아이가? 시간 될 때 갈 자리 봐 둬야지”  

     

그 어르신의 유일한 걱정은 혹여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 후손이 생기는 일이었다.


 “앞사람 죽고 나면 다음 사람 죽고 그렇게 순서가 맞으면 얼마나 좋겠노?”     


어르신은 자신의 죽음조차도 흙으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순리로 덤덤히 받아들였지만 오직 한 가지 자기 가문에 가슴 아픈 이별의 역순(逆順)만은 없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그래도 자신이 묻힐 땅을 스스로 다듬는 심정이 어떠할지 선뜻 감이 오지 않는다. 

그렇잖아도 홀로 뒷산 길을 산책하면서 제법 둥치가 큰 나무들이 바람에 쓰러져 있거나, 무너진 비탈에 휩쓸려 뒹구는 것을 보면서 오래 자란 나무도 뿌리가 뽑히는 날의 

순서는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사람이나 자연이나 선입선출의 섭리는 없는가 보다. 

생로병사가 자연스러운 것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언제 운명의 흐름이 역변하거나 소용돌이칠지 모르는 것이 우리네 삶이고 일상이다. 

어쩌면 그 불확실성의 미래조차도 왜 그러냐고 묻지 않고 

가만히 가슴에 품고 사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그래도 그 어르신의 바람대로 삶의 순리가 

그 가문에 펼쳐지기를 마음 깊은 응원을 보낸다.  

   

문득 언젠가 들은 우스갯소리가 생각난다. 

어느 칠순잔치에 초대된 친구에게 잔치의 주인공에게 

덕담을 하나 해달라고 주문했단다. 

그러자 그 친구가 대뜸 어르신에게 “어르신 빨리 죽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더란다. 당연히 그 말을 들은 어르신은 얼굴이 화로 붉어지며 호통을 칠 수밖에. 

“뭐? 이놈이 남의 잔치에 와서 그게 무슨 말이고!”   

노인의 호통 소리에 그 친구는 빙긋이 웃으며

“끝까지 들어 보세요 어르신. 아들보다 빨리 죽고, 딸보다 빨리 죽고, 

손주보다 빨리 죽어야 복 아닙니까?” 하더란다.


인간 생사의 복이 그렇다. 

세상에 온 순서에 따라 세상을 떠나야 남겨진 자나 떠나는 자나 

가슴 아픈 이별을 피하지 않겠는가! 

우리 할머니는 올해 백 한 살이 되어 장수를 누리고 계시지만 

오래전 떠나보낸 이모님을 가슴에 묻고 사셨다. 

그때 할머니께서 “내가 너무 오래 사니까 이런 슬픔을 당하는구나.” 하시며 

가슴을 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삼삼하다. 

그때 “내가 먼저 죽어야 하는데”라는 말을 소망으로 붙잡고 사는 것이 

우리들의 연약한 인생이구나 싶어 마음이 쓸쓸했었다.       


숲 속 소로에는 이제 막 뿌리를 내린 가녀린 들풀이며 가냘픈 소나무며 잡목들이 

길섶까지 침범해 들어오고 있다. 

이 녀석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일까? 

낙락장송으로 울창하게 자라날까? 

아니면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에 밟혀 그만 시들어 버리고 말까? 

해맑은 어린아이들을 볼 때마다 나는 풀 섶을 따라 자라 오른 

작은 나뭇가지들이 떠오른다. 

부디 제 몫의 푸름으로 둥치 굵은 오롯한 삶이 되었으면 하는 

깊은 응원과 연민에 마음이 뭉클해진다. 

이 나이까지 살아보니 한 세월을 살아낸다는 것이 만만치가 않다. 

뒤를 돌아보면 거기 상처 많은 날들이 울고 있던 때가 어디 한두 시절이던가! 

셈할만한 업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 거친 날들을 용케도 견디어 냈구나 싶어 

나도 모르게 나를 다독이게 된다.      


며칠 전 어느 모임에서 자신의 인생 황금기가 언제였는지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혹시 내 인생의 황금기가 언제였는지 말씀해 주실 분 계신가요?” 

하지만 내 질문에 선뜻 손을 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뒤쪽 어디선가 “인생의 황금기가 있긴 있었던가?”하는 

자조 섞인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 앞에 “인생의 황금기가 기억나지 않는다면 아직 황금기가 오지 않은 거네요. 

희망을 가져 보세요!”라는 상투적인 격려를 날리기엔 낯이 뜨거웠다. 

그때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의 황금기요!”라는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내였다. 띠용~ 

시골 아낙으로 소박하게 늙어가는 날들을 뻔히 알고 있는데... 

인생 황금기하고는 분명한 괴리가 있는데... 

아내가 다시 말했다.

 “더 얻을 것도, 욕심낼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지금이 

내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날들이에요.” 이런 기특한 마누라 같으니라고!     


요즘 부쩍 예기치 않게 다가올 불확실한 미래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마음의 습관을 가지고자 애를 쓴다. 

나이가 들면서 언제 치명적인 질병의 창에 찔릴지 염려가 들기도 한다. 

그때 그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왜 하필 납니까?” 

라는 분통을 터뜨리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마음의 표어 하나를 내걸고 마음을 다잡는 연습을 한다.  

   

 ‘어찌해볼 수 없는 불가항력의 일들과 맞부딪칠지라도 순리처럼 덤덤히 받아들이자’ 


무던한 마음으로 자신의 묫자리를 다듬던 어르신처럼 

그렇게 담백한 마음으로 한 세상을 살고 싶다. 

언젠가는 다 두고 떠날 것인데 무슨 미련이 있어서 욕심을 부릴 것인가! 

아내의 말처럼 더 가질 것도, 더 바랄 것도, 더 잃을 것도 없는 

삶의 언덕을 조용히 내려가고 싶다. 


운명 속에 담긴 얼굴의 선한 표정을 따라가면 그만 족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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