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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솔 Sep 20. 2022

그대의 꿈은 건강하신가?

산골 일기 삼십칠 번째

    매주 수요일 저녁이면 자석에 끌린 듯 TV 앞에 앉아 있곤 했다.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에 빠져들다 보면 무겁게 어깨를 내리누르는 삶의 짐들이 조금은 덜어지는 듯했다. 아무런 눌림 없이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그들의 모습이 얼마나 큰 대리만족이 되었던지! 실타래처럼 얽힌 책임이라는 짐을 벗어던지고 싶은 욕망을 잠시나마 달랠 수 있었다. 아마도 내가 하념 귀촌을 꿈꾼 것에 그 프로그램이 일조한 바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귀촌이 어디 그뿐이었겠는가! 원래 시골에서 나고 자랐던 태생적인 회귀본능이 꽤 내 오래된 꿈으로 나를 이끌었으리라. 나이가 들면서 번거롭지 않은 단순한 삶을 살고 싶다는 소망을 잠재우기 힘들었다. 불필요하거나 부적절하게 널린 인간관계도 줄이고 소중한 사람들에게만 마음을 다하는 그런 작은 울타리의 삶을 꿈꿨다. 무언가 이뤄내고 성공하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는 숨 막히는 경쟁의 구도에서 벗어나 흙처럼 물처럼 살고 싶었다. 그냥 아무것도 아니고 싶었다.         


하지만 삶의 수레바퀴는 언제나처럼 가볍지 않았다. 일 년 여의 시간이 지나고 나니 단순함의 행복은 무료함이 되었고, 무익한 공허가 되었다. 단순한 삶 속에는 분명 행복이 담겨 있었지만 이것이야말로 무위도식한 

삶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스멀스멀 엄습해오곤 했던 것이다.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인간이란 존재는 어쩔 수 없이 가치지향적 본능의 존재인 것이 분명했다. 나는 존재가치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던 어떤 날로부터 확연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나답게 살아야 한다는 명제를 넘어 인간에게는 나답게 살려는 꿈의 현실적 토양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답게 살려는 의도와 생각을 풀어낼 수 있는 토양이 있어서 나의 땀과 노고가 현실적으로 담길 때 비로소 존재론적 행복이 충만해진다는 것을 말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삶을 잠식해 들어오는 공허의 어둠을 걷어낼 수 있게 된다.      


세상 어디든 둘러보라! 목적 없이 존재하는 것이 단 하나라도 있는가? 아무런 의미 없이 동그라니 외떨어진 존재는 그 어느 곳에도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자신만의 존재 의미가 있고, 목적이 있다. 자은 구멍 하나, 작은 돌기 하나 모두 목적이 있어 그 자리에 있다면 하물며 인간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뜻 없이 무위도식한 삶을 살다가는 것은 어쩌면 정말 슬픈 일이다. 그 무엇보다 소중한 세월을 무위로 돌려 버리는 일은 정말 공허한 어리석음이다. 이런 깨달음은 그저 소박하게 살겠다는 내 생각을 공동의 가치를 추구하는 공동체를 

이루겠다는 꿈으로 변화시켰다. 시골에 와서 일정기간 무 위한 시간이 지나고서야 나는 비로소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다.      


도시에서 조직에 매여 있을 때는 나의 원함과 상관없이 산적한 일들로 인해 무엇인가를 꿈꿀 엄두조차 누리지 못했다. 삶이라는 파도는 끊임없이 내 시간을 갉아내서 잘디잔 모래알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그 결과로 

얻은 성공은 언제나 나의 성공이 아니었다. 세상을 새롭게 하거나 바로 세우는 일도 아니었다. 나는 그 안에서 바쁨이 나의 존재가치를 입증하는 훈장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바쁨은 ‘일’이라는 감옥 속에 나를 가두고 내 삶의 시간들을 좀먹고 있었다. 나는 삶을 꿈꾸지 않았고 오직 성공을 꿈꾸었다. 공허한 삶이었다. 모두가 성공했다고 축하의 박수를 보내주던 뒤 안에서 소리 없이 울던 날 나는 그 공허함을 깊이 깨달을 수 있었다. 성공의 뒤끝은 항상 허무하고 쓸쓸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초라한 은퇴의 순간에 비로소 삶의 꿈을 꾸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누군가 나를 찾는 바쁨에서 벗어나고 나니 비로소 진실한 인생의 그림이 보였다. 지나온 삶의 가장 화려했던 순간들의 그 초라하고 옹색한 본모습들이.      


그 꿈의 걸음으로 나는 아이들을 품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성적으로 평가받는 시스템의 그늘 속에서 신음하는 아이들의 어두운 얼굴이 눈에 밟혔다. 그 누구라도 본인이 원치 않는 평가의 잣대 속에 불행한 삶을 살아갈 이유가 어디 있을까! 자긍심으로 빛나는 아이들의 얼굴을 그리며 아이들과 함께 집 짓는 일을 시작했다. 

집이 지어져 가듯 아이들 한 사람 한 사람 인격의 집이 지어져 가기를 소망하면서... 아이들과 집을 지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나의 행복이 아니라 아이들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되는 기쁨을 맛보았다. 자크 라캉은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라고 정의했지만 나는 다르게 말하고 싶다. ‘인간은 타인의 행복을 욕망할 때 진정 행복한 존재’라고 말이다.     


성경의 시편에는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아진다’라는 구절이 있다. 무슨 뜻일까? 이 성구는 나에게 ‘너의 꿈은 어디로부터 출발한 것이냐?’라고 묻는다. 꿈의 출발점이 틀리면 그 꿈은 헛된 것이 되고 만다고 내게 당부한다. 그렇다. 우리의 꿈이 결핍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출발한다면 그 걱정에 비례한 욕망이 자라 결국엔 인생을 번거롭게 하고야 말 것이다. 인생을 뒤돌아보면 자신을 움직이게 했던 

거의 모든 원인이 결핍을 극복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나왔음을 부인할 수 없지 않은가! 내가 꾸었던 꿈의 한계도 늘 그랬다. 비록 꿈이 이루어졌을 때에도 나는 여전히 공허하거나 번거로운 인생의 길목을 서성이고 있었다. 내 꿈과 소망은 항상 나의 성취 너머 누군가의 좌절을 불러일으키는 제로섬 게임 같은 것이었다. 나의 성공은 항상 누군가의 실패와 좌절이 어두운 그늘처럼 동반되는 것이다. 나의 성공은 누군가의 탈락과 실패를 

전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내게 소망이었던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뼈아픈 좌절이었던 것이다. 


귀촌을 하고 나서 나는 또 다른 귀촌을 꿈꾸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나의 이득과 행복이 아닌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자연의 이치처럼 더불어 사는 행복을 꿈꾸는 마음으로 오시라고. 

그리고 그저 신선한 공기, 소박한 일상만을 원한다면 굳이 귀촌할 필요 없이 간혹 공기 좋고 풍광 좋은 곳으로 여행을 다니시면 그만이라고.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가치지향적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를. 시골에 들어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어떤 

가치로 존재론적 나를 지탱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라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시기를 간곡한 마음으로 권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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