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푸른솔 Aug 20. 2022

실패는 결과가 아니고 과정이다

산골 일기 스물한 번째

오랜 친구는 거의 삶에 달관한 모습이었다. 

인생의 오르막길에서 암이라는 청천벽력을 만난 친구라고는 믿기지 않는

 평온함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암 진단을 받고도 ‘조기에 발견되어 감사하다. 수술할 수 있는 체력이 돼서 감사하다’며 웃으며 의사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니 참 대단한 친구다. 

예기치 않은 비극 앞에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그 친구를 보면서 새삼 내 나이를 되새기게 된다.

 ‘육십이 넘었다는 것은 언제 죽어도 이상한 나이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생각해 보면 육십 년 동안 써먹은 몸과 마음 어느 한구석에 고장 하나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다만 그 고장이 돌이킬 수 없는 중병이 아니기를 바랄 뿐.  

     

은퇴 이후의 삶 가운데 건강을 챙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낡아지는 것이 

육신이라면, 정작 중요한 것은 언제 세상을 이별해도 괜찮을 만큼 정갈하게 

사는 일이다. 미처 이별을 고하지 못하고 떠나는 날이 온다 할지라도 남겨진 추억의 

그림이 아름다울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치 모든 삶의 전투가 끝나버린 양 

분투를 내려놓아서는 안 된다. 

삶은 끝나는 그 순간까지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암 투병 중인 친구의 담담한 고백 속에 

그의 삶이 여전히 치열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여기서 끝인가 싶었지. 하지만 내가 먼저 내 삶의 끝을 정하고 싶지는 않았어. 어쩔 수 없는 끝이 올지라도 가던 길을 묵묵히 걸어야지 싶었지.”     

그 친구와 얘기를 나누면서 하나의 격언을 떠올렸다. 

‘실패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그 친구가 암을 이겨내는 비결이 그랬다. 

암을 통해 좌절 속에 용기를 얻는 법을 배웠고, 예기치 않은 비극적 소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상심을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배움은 다시 누군가에게 전이되어 새로운 삶의 감동과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자양분이 되었다. 그러니 그 친구에게 있어 암은 새로운 일을 조금 더 가치 있게 시작하는 과정에 불과한 것이었다.   


친구의 고백은 내게 큰 위안이 되었다. 

나이 들어 새롭게 도전하는 일들이 주는 ‘실패하면 어쩌나?’라는 막연한 불안감이나 

초조함, 조바심이 나를 감싸고 있을 때, ‘실패는 결과가 아니고 과정일 뿐’이라는 

친구의 말은 내게 큰 용기가 되었다. 

그 말의 의미를 되새기니 못할 일이 없었다. 

실패는 내가 스스로 그렇다고 인정하지 않는 한 실패일 수 없는 것이었다. 

어떤 순간도 내가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유명한 야구선수 요기 베라가 남긴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라는 말처럼.     


은퇴하고 나서 재미있을 것 같은 일들을 몇 가지 신나게 벌였다. 

인구 소멸 위험지역을 여행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크라우드 펀드에 론칭한 것, 

사회적 기업가 육성사업에 도전한 것, 아이들의 자긍심을 키우는 사업을 모체로 하는 사회적 협동조합을 결성한 것, 낙후된 농촌지역 살리기를 위한 새로운 소득사업의 

개발 등... 무엇을 얻거나 누리겠다는 욕심을 모두 내려놓으니 

그 일들이 마치 낮은 데로 물길이 트이듯 이리저리 절로 이루어져 간다. 

내 것 챙기려는 눈만 지그시 내려 감으면 세상에는 즐거운 일이 가득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직장에 있을 때는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다큐 프로그램을 열심히 시청하며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꿈을 꾸곤 했는데, 실제 은퇴하고 나니 

그런 삶은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몇 개월을 지내본 결과 

목표가 분명하지 않은 일상은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은퇴 이후 존재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자신의 존재 이유와 필요성이 입증될 때 인간은 진정으로 행복하기 때문이다. 

직장에 다닐 때는 급여를 상쇄시켜야 할 업무들이 항상 존재했다. 

그리고 그 업무들로 인해 스스로가 가치 있는 존재라는 착각을 하곤 한다. 

하지만 직장밖에 서면 더 이상 그 누구도 내게 오더를 내리지 않는다. 

바로 그때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동안 내가 주인이 아니라 주어진 일의 노예였다는 사실을. 

그래서 아무도 명령하지 않는 자유인으로 섰을 때, 

그 자유가 오히려 부담스럽기 조차 하다는 것을.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할지 자신이 결정하고 선택하는 일이 

버겁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내 안에 나도 모르게 깊이 뿌리 박혀있는 노예근성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스스로에게 계획하고, 명령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능동적인 삶이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자충우돌 새로운 일들과 부딪히면서 나는 이제 조금씩 

누군가로부터 주어진 오더에 익숙한 삶이 아닌 나 스스로의 삶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은퇴의 뒤꼍에 머물러 있지 말고 당신의 존재 의미, 이유, 가치를 찾아 헤매라. 

비록 그 가치를 찾지 못한다 할지라도 가치를 찾아 여정을 떠났다는 사실 만으로 

당신은 충분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처럼 가치를 위해 달려가는 것 자체가 이미 가치를 누리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결과가 뭐 중요하겠는가! 

모든 인생이라는 것이 결국 과정을 살다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차원에서 나는 앞의 격언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인생은 결과가 아니고 과정이다’ 


어쩌면 결과가 아닌 아름다운 과정을 남기고 떠나는 것이 우리네 삶의 여정이 아닐까!     

‘친구야! 너의 병이 정말 결과가 아니고 과정이기를 두 손 모아 빈다’     

이전 12화 안녕 가을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