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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솔 Sep 26. 2022

안녕 가을아!

산골 일기 사십한 번째

소매 끝이 제법 쌀쌀해졌다. 먼발치에서 가을이 빼꼼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무성했던 여름이 일궈낸 영광의 황금빛이 무르익고 있다. 더위가 식은 가지마다 열매들이 소란스럽다. 뜰에 심어둔 대추나무 열매에도 붉은 기운이 깊어가기 시작했고, 뒷동산에 주렁주렁 매달린 단감들도 노란빛이 탐스러워져 가고 있다. 

‘한가위에 굶어 죽는 거지는 없다’는 말처럼 온 땅이 여름 내내 수고한 결실로 바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양옆으로 펼쳐진 너른 논두렁마다 알알이 맺힌 알곡들이 한결 무거워진 머리를 눕히고 있다. 바야흐로 계절이 절정을 향해 가고 있다. 그런데 나는 그 부산스러움이 왜 벌써부터 막막한지 모르겠다. 이별의 순간을 애써 잊으려는 연인들처럼 들마다 들썩이는 흥이 애써 깨워낸 듯 애잔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언뜻언뜻 스치는 소맷자락의 찬 기운이 흠칫 이른 겨울을 느끼게 할 때면 더욱 그런 마음이다. 하지만 나는 애써 헐벗은 겨울을 잊고 잠시만이라도 풍요에 가득 찬 가을을 가슴 깊이 누려보려 한다.


동그마니 익어가는 가을 -     


모난 날들이 

도깨비 풀처럼 달라붙는 세월이었지만

그래도 열매들이

동그마니 익어가는 가을입니다.     


가을만이라도 애써 벼려둔

날카로운 것들을 내려놓고

바람 부는 대로

햇살 닿는 대로

그렇게 익어가야겠습니다.     


기승을 부리던 더위도

꽁지 빠지게 달아난 지금

날큼했던 모든 모서리의 흔적들을 지우고 

순해빠진 가을처럼

마음을 무장해제합니다.     


세월이 가면 그저 아무것도 아닌

감정의 낙엽들을 태우면서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대와 내 마음을 다독이는

그런 넉넉한 가을이 익어갑니다.     


다가오는 가을의 언덕 위에 앉아 조금씩 영글어가는 가을의 얼굴 앞에 작은 글 하나를 선물해 본다. 그렇게라도 하는 것이 가을을 맞이하는 예의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아무튼 풋내 나는 과일이 익어가는 것처럼 세월과 함께 익어가는 일은 멋진 일이다. 여린 꽃대가 지고 그 고운 빛을 열매로 승화시켜 나가는 일은 숭고한 일이다. 지금 가을이 그 숭고한 일을 짧아져 가는 햇살 아래 치열하게 해내는 중이다. 

      

해마다 가을이면 미국 여행 중 잠시 들렀던 사브리나 호수가 생각난다. 로스엔젤리스 북부에 위치한 사브리나 호수는 산울이며 길섶으로 온통 커튼우드가 둘러쳐져 노란빛 투명한 잎새가 바람에 팔랑거린다. 가을의 투명한 햇살이 투과된 노란 잎새가 일제히 바람에 흔들리며 지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마치 온 들녘에 앙증맞은 노란 조명이 켜진 느낌이다. 그리고 호수에 흩날린 잎새는 맑은 물 위에 아름다운 모자이크를 만들며 또 다른 아름다움을 선물한다.       


“구 선생. 나는 여기서 죽어도 좋겠네.”     


함께 여행하던 이선생이 그 아름다움에 압도된 먹먹한 눈길로 내게 말했다. 처연함이 가득한 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했다.   나는 그때 지극한 아름다움을 만나면 죽어도 좋을 만큼 마음이 무장 해제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가을은 그런 계절이다. 봄철의 풍경을 바라보며 ‘죽어도 좋아’라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은 없다. 그러나 깊어 드는 가을 앞에 마음의 짐을 모두 내려놓는 사람들은 숱하게 보았다. 가을은 그런 계절이다. 이내 미련 없이 모든 것을 떠나보낼 그 절정의 아름다움이 보는 이의 마음을 품어낼 만큼 애잔하고도 장엄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터인가 가을을 남자의 계절이라 부르기도 한다.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겨울을 미리 예견한 남자의 넉넉함, 욕심으로 끈적이는 질감이 없는 담백함, 그 느낌이야 말로 진정한 남자의 향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잠시 짬을 내서라도 올해는 어디 가을이 깊어 드는 작은 호수라도 찾아가 봐야겠다. 커튼우드의 투명하게 팔랑거리는 노란 잎새를 볼 수 없을지라도 조금씩 붉어드는 자연의 내음이라도 맡아보아야겠다.   

  

마을에 둘러쳐진 화살나무 잎새 중 몇은 벌써 짙은 선홍색이다. 일에 파묻혀 미적거리다가 보낸 가을이 내 인생에 얼마나 많았던가! 올해는 꼭 가을의 심장 아래 서 보리라. 그 심장 아래서 여유롭지만 그 넉넉함을 모두 내려놓을 수 있는 그런 투명한 걸음을 배워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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