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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솔 Sep 29. 2022

주관(主觀) 버리기

산골 일기 사십네 번째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자기만의 관(觀)이라는 것이 생긴다. 아니 어쩌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만의 관(觀)을 갖기 위해 애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 경우에도 살아가면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자기만의 독특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즐거웠고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자기만의 관(觀)을 얻기 위해 애쓴다고 해서 자신의 삶을 정렬할 수 있는 가치관을 세우기가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삶에 대한 수많은 정의들과 생각들의 대부분은 누군가가 자신의 인생 바쳐 이루거나 쌓아 올린 것들이다.  하여 대부분의 경우 자신만의 독특한 시선이나 관점이라는 것은 살아온 세월의 경험과 습관과 학습과 기호의 총량이 만들어낸 필연일 것이다. 바위에 낀 이끼처럼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쌓인 자신만의 관점이나 경험의 총량은 자연스럽게 자신만의 안경을 만들어 낸다. 지독한 가난을 경험한 사람의 물질관은 부자가 되어서도 어쩔 수 없는 소유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지기 쉽고, 지독한 배신이나 실연을 당한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 의심부터 하고 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결국 자신의 경험을 통해 학습된 과정이나 결말이 자기만의 기준을 만들어 내고 그 기준의 습관에 고착되는 것이 우리의 보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경험의 독특함과 한정됨이 자칫 왜곡된 시선, 왜곡된 패러다임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이다. 동일한 사건일지라도 시대의 흐름, 역사적 배경과 환경에 따라 논점과 결론이 달라져야 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상식이다. 그런 점에서 자신만의 경험을 토대로 쌓은 자신만의 관점(觀點)이 고착되면 얼마나 많은 편견과 오류를 만들어내는지 깊이 유념해야 한다. 따라서 경계하고 경계할 일은 자신의 시각, 논점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전에 보편타당한 시각으로 시대정신과 흐름에 대비하여 오류가 없는지를 헤아려 보는 지혜일 것이다. 그런 헤아림이 세상살이의 기본적인 상식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상식(common sense)이라는 말은 단순히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감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보편타당한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그 사람 참 상식적이야’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은 말이 통하는 사람이야’라는 의미이다. 말이 통하는 사람, 달리 말하면 그런 사람이 상식적인 사람인 것이다. 상식이 있다는 것은 돌아가는 이치를 이해한다는 것이니 그런 사람과 나누는 이야기에는 상쾌한 즐거움이 가득하다. 반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물 없이 삼킨 퍽퍽한 감자처럼 가슴이 막힌다. 왜곡된 상식이 소통을 끊어내고, 쓸데없는 오해를 만들고, 반목과 단절을 만든다. 그러니 경계하고 경계할 일이다. 보편타당한 상식을 잃어버리면 편협한 자기 관점으로 인해 스스로를 삼키는 독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말 테니 말이다. 제 관점과 기준만 고집하며 외골수로 늙어가기엔 인생이 너무 짧지 않은가! 


그러니 다른 측면, 다른 차원, 다른 개념에서 일상을 바라보는 독특하고 신선한 관점은 언제나 좋은 것이다. 그런 관점들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어 주고 새로운 방향과 길을 열어준다. 조금 다르게 보면서 얻어지는 새로운 개념과 해석들, 기존의 관점으로는 도무지 앞길이 보이지 않았던 일들이 새로운 시각으로 돌파구가 열릴 때마다 얼마나 큰 기쁨이었던가!      


하지만 인생의 후반기를 맞이하면서 내 생각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나는 지금 그동안 쌓아온 나만의 주관들을 어떻게 하면 내버릴 수 있을까 애쓰고 있다. 환갑의 나이가 넘어가면서 나만의 관(觀)이라는 것이 갖는 허구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나만의 관점이라는 것이 자리 잡고 나서 소위 구별하는 마음, 차별의식이 어쩔 수 없이 내 안에 깊게 뿌리내린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나만의 관점에서 이건 맞고 저건 틀리고, 이건 옳고 저건 그릇되었다는 기준들이 절로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호불호가 갈리면서 내편, 네 편의 불편한 구분이 생겼다. 나만의 관점에 기준하여 함께해야 할 사람들과 삶의 외곽에 방치해 두어야 할 사람들이 구분되었다. 관점은 그렇게 한계를 정하며 나의 자유로움을 박탈하고 나만의 작은 상자 속에 나를 가두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상자 속의 뜨락은 시간이 흐를수록 좁아져서 겨우 손가락으로 헤일 정도의 소수의 사람만이 서성이는 공간이 되고 말았다. 나만의 개성이 뚜렷해져 갈수록 내 인생은 더 깊이 외롭고 쓸쓸해졌다. 나는 그때 자신만의 관점과 기준을 파괴시키지 않고는 결코 사람들과 화평한 삶의 끝을 맞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소스라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전원생활을 시작하면서 매일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자연은 항상 치열하면서도 조화로운 곳이었다. 부분적으로는 생경한 군락을 이루고 있던 나무들도 전체를 놓고 보면 조화로운 한 부분을 수놓았다. 쇠락하고 번성하는 모든 것들이 조화의 햇살 아래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 자연을 매일 접하면서 더더욱 나만의 관점을 내려놓으려 애쓴다. 내 독특한 관점을 고수하기보다 보듬고 가야 할 아름다운 가치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모든 다양성을 품고 가는 일이 나만의 독특함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자기 개성이나 주관 없이 그냥 허허 웃으며 살아가는 줏대 없는 부드러움이 똑똑하고 치열한 나보다 훨씬 나았다.   

  

“아무 생각 없어요. 여러분들 가시려는 방향으로 즐겁게 따라갈게요.”     


사람들과 난마처럼 얽힌 일들도 그냥 말없이 따라가다 보면 낮은 데로 흐르는 물처럼 허술했던 자리들이 채워지는 것을 보게 된다. 앞장서서 나를 따르라 하지 않아도 가볍게 길을 가다 보면 자연스러운 물줄기들이 생긴다. 그런 순리의 물줄기는 거칠게 일렁이는 물결이 되기도 하고 부서뜨리는 노도가 되는 때도 있지만 결국은 도도한 강물이 되어 너른 바다로 흘러간다. 상식의 대세를 조용히 따라가는 것. 삶이 별거냐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묵묵히 대세를 수렴하는 삶이야말로 별거 있는 삶이라는 생각을 한다.       


나는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나만의 관(觀)을 얻기 위해 힘썼지만 이제는 나도 모르게 배인 관(觀)을 버리려 애쓴다. 나를 우쭐대게 만들었던 독특한 시각이나 관점이라는 것이 살아보니 다 부질없는 것들이었다. 공연히 원수를 만들고 적을 만들어내는 벼린 창끝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날카로움을 다 내려놓고 소박한 자연의 아름다움 앞에 서보면 무엇인가의 배경이 되어 무명의 아무개로 스러진들 뭐 어떠랴! 마음의 욕망들이 물거품처럼 꺼지는 것을 느낀다. 


한순간이라도 자연에 어울리는 조용한 풍경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면 그것으로 됐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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