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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솔 Sep 15. 2022

유통기한을 아끼는 이유가 뭔데?

산골 일기 서른다섯 번째

2012년 칸 국제광고제에서 PR Lion 부문 금상은 아르헨티나의 작은 출판사인 이터나 카덴시아(Eterna Cadencia)가 제작한 글자가 사라지는 책이었다. 일명 ‘기다려 주지 않는 책’(The Book That Can’t Wait)이라는 이름의 이 책은 출시되자마자 품절되는 큰 인기를 누렸다. 이 책은 구매자들이 책을 사기만 하고 읽지 않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밀봉된 책을 펼친 후 공기와 햇볕이 닿으면 60일 안에 잉크가 증발하여 글자가 

사라지도록 고안되었다. 즉 모든 글자를 일정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특수 잉크로 인쇄한 것이다. 그 책의 

출판사는 읽히지 않은 책이 무한히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담고자 했다. 생각할수록 참 기발한 아이디어다. 덕분에 그 책을 산 독자들은 혹여 글자가 없어질까 하는 마음에 서둘러 그 책을 완독 했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기다려주지 않는 책’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는 기다려 주지 않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언제나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모든 것은 시간의 함수에 따라 시시각각 변해간다. 지금 누리지 못하면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 기회들, 지금 말하지 못하면 다시 얻을 수 없는 감정의 편린들이 얼마나 많은가? 언제나 소중한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기회를 놓친 화해와 용서의 순간들이 세월의 콘크리트에 파묻혀 오랜 외면의 날들을 만드는 것을 숱하게 보아왔지 않은가! 그래서 오늘 사랑한다 말하고, 오늘 미안하다고 말하고, 오늘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 살아가는 현실이고 삶의 실체이다. 세상 모든 것에는 유통기한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악의 실현이 아니라면 지금 사랑한다고 말하자. 지금 미안하다고 말하자. 지금 고맙다고 말하자. 


인생을 다 산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남겨지는 후회가 왜 사랑해미안해고마워 라는 말을 하지 못했을까?’ 였다니 굳이 유통기한이 다 끝나가는 시점까지 아껴둘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때로 유통기한 안에 감정의 편린들을 털어내기보다 유통기한을 늘리기 위해 무던 애를 쓴다. 마치 여름철 끓여낸 국이 상하지 않도록 매번 다시 끓이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조금씩 졸아든 

국은 결국 첫맛을 잃고 버려진다. 애써 같은 상태로 되돌리려 하지만 결코 처음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다. 

굳이 엔트로피의 법칙을 따지지 않더라도 시간에 물든 것들은 모두 쉬거나 상하게 마련이다.     

 

사랑마저 그렇다. 죽고 못 살던 기간이 끝나고 나면 식어버린 검댕만 남는다. 그때 서로를 향해 변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누가 변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유통기한을 경험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사랑의 관계도, 

인간관계도 변하지 않는 것이 목적이거나 덕목이 아니다. 관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변함없음이 아니라 성숙해져 가는 데에 있다. 오히려 더욱 아름답게, 좀 더 그윽하게, 좀 더 고양된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고 관계이다. 그런 점에서 사랑의 성숙한 모습이 어쩌면 ‘정(情)’일지도 모르겠다. 돌아서면 보고 

싶고 헤어지는 순간마다 다시 그리워진다면 어떻게 정상적인 생활이 되겠는가? 불꽃같은 사랑이 은근한 정으로 남아 햇살 담은 토담처럼 기댈 수 있는 품이 되는 것. 사랑도 변해야 아름답고 비로소 소중한 진짜 사랑으로 남는 것이 아닐까?     


9월이 되면서 뜨락의 풀꽃들은 키 자람을 멈췄다. 화려했던 여름 꽃들은 꽃 몽우리를 닫고 볼품없는 씨앗을 

품기 시작했다. 화려한 순간 속에 자신을 담지 않고 다음 사랑을 키워낼 준비를 시작한다. 나는 스스로 시들어가는 작은 풀꽃들의 사랑이 눈물겹다. 존재하는 순간을 즐기다가 다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꿈을 품는 그 꽃씨들이 예쁘다. 다시 꽃이 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세월이 그 안에 담겨있는지! 인위적이지 않아도 성숙하게 

변화된 사랑은 오래도록 그 맛이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산골에서 함께 늙어가는 아내가 더욱 사랑스럽다. 젊은 시절의 고운 모습이 사라져서 오히려 정겹다. 낡아져 가는 세월의 귀퉁이에 서서 함께 낡아져 가는 것이 가을 햇살처럼 맑아서 좋다. 천년만년 살 것 

같았던 사랑을 내려놓고 이 햇살이 살아온 날보다 적다는 것을 막막하게 바라보면 늙어가는 아내가 가을 햇살만 같다. 바람이라도 난 듯 들떴던 봄날의 햇살과 뜨겁게 불태우던 여름날의 햇살이 사라지고 짧은 걸음으로 넘어가는 따스한 햇살만 같아 더욱 소중하다.      


내 오랜 기억 속에는 결국 들쳐보지 못하고 사라진 ‘기다려주지 않는 책’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기억의 책장 속에 글자의 흔적만 남기고 사라져 간 관계와 의미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하지만 비록 글자는 사라졌지만 

내 아름다운 기억으로 새로워진  이야기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아내는 간혹 먹다 남은 국에 또 다른 조미를 하여 새로운 맛을 선보이곤 했다. 이전의 국 맛을 잊어버릴 만큼. 그렇다. 오늘도 내 인생의 갈피에서는 오랜 문자들이 사라져 갈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의 감정과 오늘의 소망을 붙잡고 오늘의 할 일을 할 것이다. 

그래서 내 안에 사라져 가는 글자들이 누군가의 기억으로 다시 활자화되기를 꿈꿀 것이다. 사라짐이 사라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짐으로 해서 오히려 그 누군가에게 애틋하고 정겨운 기억의 활자가 되기를 꿈꿀 것이다. 


낡은 껍질 속에 담긴 씨앗의 새로운 사랑처럼 그런 기억의 고운 너울 너머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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