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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솔 Oct 17. 2022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

산골 일기 오십 번째

가을이 깊어가면서 아침이면 밤새 토해낸 용의 한숨 같은 구름이 골마다 잠겨있다. 멀리 천황봉을 휘돌아 나온 낮은 안개는 신등천을 따라 일어나는 물안개를 머금고 이곳 황매산 자락까지 아득하게 이어진다. 

밤새 비라도 듣는 날이면 우뚝한 산자락마저 어스름할 만큼 햇살도 희미하다. 

이 가을의 끝자락에서 나는 소리 없는 것들이 흔들릴 때는 그만큼 간절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멀리 냉담하게 다가서 오는 겨울을 바라보며 온 땅 너울이 긴장하는 것을 바라보며 자연이나 우리네나 삶의 고단한 베갯머리를 뒤척이게 하는 잔 근심은 메 한 가지인가 싶다.     

 

하지만 아직은 잔불 같은 단풍이며 불꽃의 광휘로 반짝이는 잎새들이 산자락을 수놓고 있다. 그 빛깔의 향연 속으로 새벽의 첫 빛살이 사선을 긋고 자날 때 그 눈부심은 숨이 멎을 듯 아름답다. 산과 산의 너울을 타고 터져 나오는 봇물 같은 빛살에 젖을 때마다 까짓 삶의 고단한 기억들이 모두 잊혀진다. 한 순간의 영광만으로, 한 순간의 기억만으로도 삶은 살아갈 이유로 충만해진다. 다가오는 겨울은 또 겨울대로 견디는 아름다움이 있을 터이다.        


뜨락에는 지난여름 심었던 메리골드와 구절초 그리고 동국 몇 송이가 급작스럽게 영하를 넘나드는 추위 속에도 아직 꽃망울을 떨구지 않고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고고한 기품을 잃지 않으려 버티는 풀꽃들의 강인한 의지가 느껴진다. 그 풀꽃 사이로 우뚝 서있는 나무들은 이미 잎새를 떨구고 생존의 어두운 그늘 속으로 칩거한 지 오래되었다. 우뚝한 둥치로 세월을 이겨내는 나무나 여린 꽃대를 떨구어 새로운 씨앗을 토해놓는 풀들 가운데 누가 더 지혜로운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봄철 겨우 몇 개의 꽃대를 세웠던 풀꽃들의 땅은 내년 봄이면 훨씬 넓어져 있을 거란 사실이다. 나는 몇 송이 남지 않은 그 꽃들을 바라보며 지나가는 가을에 마지막 작별을 고한다. 한 편의 시가 넉넉한 인사가 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 가을이 함께 가자한다.  -     


가을이 저만치 걸어와 함께 가자한다.

푸른 잎새 진자리

고운 빛 너울 쓰고

아직 시퍼렇게 살아있는

내 삶의 뒤 안을 

소슬바람 들쑤시며 붉게 달궈 낸다.


진즉에 버렸어야 할 

정념의 덧없음을 붙잡는 며칠

명멸하는 불꽃의 기억만으로

나는 살만하고

흘러가버린 시간도 있지만

영원히 머문 시간이 있음에 감사하다.     

볕이 환한 창 너머

하늘은 푸르고 

연인들은 재잘거리고

황금빛 바람이 불고

가을이 나를 지나가는지

내가 가을을 건너가는지 모르겠다.     

이미 가을에 대인 마음은

붉어져 가을이 되고

다가올 이별에도 찬란하게 눈부신데

그러면 됐다

그러면 됐다고

가을이 토닥토닥 마음을 두드린다.     


아침이 지나고 나면 이곳 산골의 산마루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시 청명해진다. 하늘은 쩌렁한 푸른빛으로 가득하고 흰 구름은 더욱 선명하다. 얽힌 실타래 같은 오해들을 모두 풀어내고 다시 어깨동무를 하고 나오는 오랜 친구처럼 해맑다. 나는 이 산골이 좋다. 앉아 있던 새들이 떠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잔가지만 홀로 흔들거리는 풍경처럼 모든 것이 분명한 섭리가 좋다. 가을이 깊어 들면서 산골의 모든 풀과 산마루, 구름과 바람에는 끈적임이 사라졌다. 투명하고 청명한 숙명만이 가득하다. 나의 존재, 상념의 작은 불꽃조차 그러하다. 

저기 저 검불이나 나나 만나고 헤어지는 일상의 모든 교차가 그저 담담하고 담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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