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일기 오십여섯번째
사람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삶을 통찰하게 하는 말 한마디라도 듣는 날은 참 행복하다.
무심코 흘린 대화 속에 곱씹어 보게 되는 말이 담겨있을 때면
눈을 가린 안개 하나가 걷힌 듯 마음이 상쾌해진다.
어떤 사람들은 삶의 풀리지 않는 해답을 찾아 수도정진하며 신비한 경험을 찾기도 하지만
나는 일상 가운데 담긴 소소하고 소박한 교훈이나 가치들이 좋다.
혹세무민 한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거대한 담론이나 원리가 아닌
일상의 하루하루를 뜻있게 살아갈 수 있는 작은 걸음의 이정표 같은 것들...
같은 세상을 숨 쉬고 같은 세상을 걸어가지만 사람마다 살아가는 길목이 다르고 무게도 다르다.
그 다른 길목, 다른 무게를 느끼며 깨달은 작은 이야기들은 우리의 다음 걸음을 단단하게 한다.
오늘보다 내일 더 성장한 나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작은 깨달음들이 쌓일 때이다.
그러니 나와 다른 생각과 깨달음에 귀를 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가!
최근 인간관계의 얽힌 실타래 속에서 헤매던 내게 들려준 가까운 이들의 이야기 몇 토막을 나눠본다.
며칠 전 일이다. 전날 내렸던 비 때문인지 자동차 유리창에 뿌옇게 김이 서려 밖을 볼 수 없었다.
서린 김을 닦아내며 김이 더 서리지 않도록 유리창 쪽으로 히터를 켰다.
서린 김이 사라지는 동안 문득 잊고 있었던 지인의 말이 생각났다.
”차 안에 서린 김을 없애는 방법은 내부의 온도를 밖과 맞춰 주는 것밖에 없지.
인간관계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어.
사람과 사람의 소통은 다른 사람의 변화를 기대하기 앞서 내가 먼저 그의 온도가 되어줄 때 이뤄지는 것 같아 “
그의 말이 떠오르는 순간 온풍에 김이 사라져 가듯 마음에 덮인 꺼풀이 걷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맞는 말이다. 변하지 않는 상대방의 변화를 기다리며 잃어버린 시간이 얼마나 많았던가!
사람을 오래 알다 보면 처음 느꼈던 좋은 면보다 나와 사뭇 다른 부분들이 더 많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바로 그때가 아마도 서린 김 때문에 밖이 보이지 않는 상황과 같은 것이리라.
그 순간에 우선한 것은 나와 다른 상대방의 변화를 기대하기보다
그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려는 나의 변화일 것이다.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 좋은 사람들이 내게 올 수 있도록...’ 어느 유명한 가수의 좌우명처럼
밖을 향한 삿대질을 멈추고 나를 들여다보는 것이 인간관계를 아름답게 하는 가장 큰 비결이리라.
또 다른 지인에게는 나를 둘러싼 어려운 상황과 환경을 어떻게 극복해 낼지 통찰력 넘치는 말을 들었다.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목욕탕을 막 나서는 순간에는
따뜻하게 덥혀진 몸속 온기로 추위가 전혀 느껴지지 않죠.
목욕탕에 들어가기 전 꽁꽁 싸맸던 외투를 열어젖혀도 오히려 상쾌한 기분이 듭니다.
우리를 둘러싼 혹독한 상황과 환경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환경과 상황은 여전하지만
내 안에 온기가 가득하다면 무엇이든 견딜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
세상의 가혹함은 어쩌면 그 강도의 문제가 아니라
내 안에 그것을 극복한 충분한 온기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이리라.
일이 생각처럼 풀리지 않을 때마다 원망과 푸념이 앞장서곤 했는데
이제는 남 탓, 세상 탓하는 버릇을 그만 버려야겠다. 원인은 항상 내게 있었을 테니까.
생각해 보면 삶이 뭐 별 건가?
오십 년을 살아도 육십 년을 살아도 뒤돌아 헤아려보면 채 오 분도 지나지 않아 전 일생이 회상의 터널을 지나가고 만다.
살아가는 순간은 지난한 것 같지만 지나고 나면 찰나의 인생인 것을 절절하게 느낀다.
작은 순간의 고리로 연결된 삶의 여정이 얼마나 소중한 지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일상의 작은 깨달음일지라도 내 걸음의 이정표로 삼는 일은
아름다운 신의 선물인 내 인생에 지극히 합당한 일이 되리라.
거창한 교훈은 아니어도 일상의 작은 깨달음에 귀 기울이며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걸음을 내딛는 것.
그것이 내가 내 인생에 베풀 수 있는 가장 멋진 보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