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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솔 Feb 09. 2024

따뜻하되 끈적거리지 않기

산골일기 오십구 번째

 미국의 문화인류학자인 에드워드 홀(Edward Hall)이 사람과 사람사이의 적절한 간격에 대해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그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사랑하는 연인들이 허용하는 

가장 친밀한 밀접거리(Intimate distance)는 45cm라고 한다. 

두 번째 친밀하게 지내는 가까운 친구나 이웃에게 허용되는 개인거리(Personal distance zone)는 45cm~1.2m 정도란다. 

세 번째 상호작용하기에 적절한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 zone)는 1.2m~3.8m, 

그리고 공적인 거리(Public distance zone)는 서로에게 가해질 수 있는 위협을 염두에 둔 

3.8m~9m라고 한다. 

인간관계의 친밀도를 물리적 거리로 정의하는 것이 얼마나 타당한지 사실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한 가지는 아무리 친밀한 관계라도 사람 사이에는 반드시 일정한 간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가깝기 때문에 오히려 간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사람들 사이의 적절한 간격은 건강한 인간관계의 핵심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독립성과 상호관계성이라는 두 개의 상반된 가치관 속에서 고민한다. 

단독자로서의 고유공간을 원하면서 한편으로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정체성이 인정되기를 바라는 

이중성을 갖는다. 그런데 지속적인 친밀한 관계는 꼭 에드워드 홀의 연구결과가 아니더라도 

일정한 거리와 간격 가운데 건강하게 유지된다는 것이다.      


이 간격의 필요성에 대해서 쇼펜하우어는 우리에게 고슴도치 딜레마(Hedgehog dilemma)라는 

작은 우화로 들려주었다. 추운 겨울 고슴도치들이 서로의 체온을 통해 추위를 이겨내기 원했다. 

그래서 가까이 붙으려고 하지만 서로를 찌르는 가시 때문에 도저히 함께할 수가 없었다. 

아픔을 피해 멀어지면 추위를 견뎌야 했고 가까이하려면 가시에 찔리는 아픔을 참아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인간관계의 작은 비밀을 이해하는데 적절한 예화가 아닐까 싶다. 

한자 성어에도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라는 말이 있다. 

인간관계는 너무 가깝지도 않게, 멀지도 않게 하는 것이 좋다는 말이다. 

이 말은 논어의 ’ 양화 편‘에 나오는 말이라 하는데 정확히 기록된 말은 아니다. 

논어에 등장하는 표현은 ’ 구이경지(久而敬之)‘인데 

후대에서 해석하기를 불가근불가원의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다. 

즉 오랜 사이일수록 예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깝다고 해서 예의를 잃어버리면 결국 그 관계를 잃게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을 다른 의미로 표현하면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예의가 들어갈 수 있는 

적당한 간격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와 상통한다. 맞는 말이다. 

어찌 되었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의 가시에 상처를 입고 

차라리 홀로 된 추위를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논어에는 그 가시를 무례함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리라.     


나에게도 예외가 아니어서 오랜 세월을 함께했던 친구들을 잃어버린 일들이 삶의 자국마다 얼룩져있다. 

생각해 보면 서로에게 적당한 거리를 찾는 지혜가 부족했을 뿐인데 

돌이키기엔 너무 멀리 와버린 관계들이 안타깝다. 

그런 수많은 시행착오의 어리석음 속에 나는 이제야 알 것 같다.   

  

  ’ 인간관계는 따스하되 점성(粘性)이 없어야 한다 ‘는 사실을.


살아갈수록 마음에 새기는 말이다. 사람과의 관계에는 사심 없이 따스한 정(情)만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따스함 속에 소위 점성이라는 것이 생기면 그 관계는 반드시 변질되고 만다. 

나는 인간관계의 점성을 기대와 바람이라 정의한다. 

인간관계에는 상호호혜의 상식적 균형이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그 호혜 안에 내가 베푼 만큼 바라는 마음이나 내가 원하는 만큼의 기대가 담기는 순간 끈적끈적해진다. 

특별히 내가 베푼 것에 등가(等價) 이상을 바라거나, 

정도이상으로 기대려는 마음이 드는 순간 인간관계는 투명성을 잃고 만다. 

무언가를 더 많이 바라거나 더 많은 허용을 구하는 것은 

그 사람과의 간격과 거리를 고려하지 않는 어리석음이다. 

이 어리석음을 내려놓아야 관계가 건강해지고 건강해야 그 관계는 오래 유지된다.  

    

그러고 보니 늘 여전한 좋은 관계는 서로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그런 관계였다. 

상대방에게 바라는 것이 하나도 없이 그저 그 적당한 거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좋은 관계였다. 

나는 아침마다 그 관계의 청명함을 집 앞 대숲에서 본다.

 대나무 가지에 앉은 아침 새들이 훌쩍 떠날 때마다 휘어진 가지는 

잠시 출렁이다가 이내 고요한 빈 가지로 남는다. 

머물러서 좋고 떠나도 그만인 감정의 가벼움 같은 것. 

나는 대나무 가지가 출렁이는 가볍지만 점도가 없는 그 청량한 담담함이 좋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지극한 마음으로 머물고 미련 없이 훌쩍 떠나기를 바라고, 

누군가가 내게 그렇게 지극히 머물다가 훌쩍 떠나기를 바란다. 

이런 생각에 정 없다 말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나는 그리하는 것이 진정한 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저 따스함만 담는 것. 상대방의 변화에 따라 조석변개하는 감정이 아닌 그저 따스함만 품은 정. 

모든 바람을 내려놓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내게 오고 나를 떠나는 그런 푸른 정(情)의 사람이 되고 싶다.         

쓰다 보니 불필요하게 장황해졌지만 한마디로 나는 쿨한 시람이고 싶은 거다. 나이 들어 갈수록 더욱 쿨한 사람이고 싶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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