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따란 평안 아래
아침에 일어나 자리를 정리했다. 잠을 잘 자고 일어났음에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어젯밤에 스페인으로 가는 비행기를 본다고 수선을 부리다가 실수한 덕에 마음이 불편했다. 왜 잘 흘러가나 싶을 때쯤 이런 일이 생길까 싶지만 또 거하게 바보짓을 했다.
비행기의 결제가 실험 삼아 등록해 본 개인정보로 이루어졌다. 혹시나 결제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카드에 '보류'로 올라간 금액이 실수한 금액과 정확했다. 아침부터 어제한 실수와 마주하자니 마음이 착잡했다.
한두 푼이면 모를까 70유로가 넘어가는 돈을 헛발짓으로 날리니 속이 상했다. 데이터는 되지만 통화는 안 되는 폰이 원망스러웠다.
당장 바꿀 수 없는 것에 집착하기보다는 오늘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내일이면 베를린을 떠나기에 늦기 전에 부지런히 옷을 챙겨 입고 방을 나왔다.
오늘은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독일의 도시를 방문하는 날이다. 뮌헨이나 프랑크푸르트를 모르는 한국인은 있어도 '포츠담'을 모르는 한국인은 드물 것이다. 역사책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그 도시가 오늘의 목적지였다.
지하철표를 끊고 근처 테이크아웃음식점을 찾았다. 아침 겸 점심을 위해 누들컵 하나를 구매했다. 용이 그려진 종이박스에 가득 담긴 면은 약간 매콤하고 달고 짰다. 포크로 먹는 면은 조금 불편했지만 꽤 먹을만했다. 지하철을 기다리며 열심히 먹었지만 절반도 먹지 못하고 뚜껑을 닫았다. 놀랄 만큼 푸짐한 양이다.
먹던 음식을 곱게 포장하고 혹시나모를 대참사를 대비해 음식물이 나오지 않게 세심한 조정을 거쳐 가방에 넣었다. 오늘 하루를 책임져줄 소중한 식량이었다.
지하철을 거쳐 버스를 타고 내렸다. 포츠담에서의 나의 목표는 오직 하나 '상수시 궁전&공원'이었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이 거대한 부지의 궁전과 공원은 꼼꼼히 본다면 하루 내리 보더라도 다 못 볼만큼 넓은 권역을 자랑하고 있었다.
도시에 다른 관광지도 있었지만 나의 목표는 '궁전 절반이라도 보기!'였기에 하나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궁전 통합권을 끊고 바로 궁궐에 입장했다. 권역 내에 건물이 많았기에 부지런히 돌아야 절반이라도 볼 수 있을 듯싶었다.
프랑스어로 '근심이 없다'는 뜻의 '상수시(Sanssouci)' 궁전은 이름과 정말 잘 어울리는 궁전이었다. 반짝거리는 건물을 보다 보니 눈이 절로 돌아갔다. 여태 보았던 건물 중에 제일 화려하고 제일 커다랬다.
어딜 봐도 보이는 매끈거리는 대리석과 번쩍이는 금빛에 눈이 피곤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도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세트장 같아서 쉼 없이 발을 놀렸다.
모든 방이 화려하고 좋았지만 마지막즈음 발견한 도자기로 만든 새와 과일로 장식된 방은 떠나기 싫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이곳에서 가벼운 낮잠을 자고 일어난다면 그것이 바로 '로망'이겠구나 싶은 방이었다.
내부도 외부도 너무 예뻐서 다음에 이곳에 온다면 사진을 배워서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루한 능력으로 폰카메라를 들이대기 너무 아쉬운 공간이었다.
다만 내 촬영실력이 나쁜 것과는 별개로 사진을 찍을 수는 없었다. 내부사진은 추가비용을 내고 티켓을 구매해야만 찍을 수 있었는데 나에게는 전날 헛발짓한 77유로의 부채가 있었기에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사진도 못 찍겠다 눈호강이나마 제대로 하자 싶어 하나하나 뜯어봤다. 자꾸 들어도 잘 모르는 건축양식대신 직관적인 감상이 떠올랐다. 화려함, 장식적인, 치렁치렁한, 눈부신, 부담스러운, 세심함, 새하얀. 그리고 예쁜.
건물밖을 나와서도 감상은 이어졌다. 흐린 하늘밑에서도 빛나는 구조물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커다란 공원을 헤매다 보니 발은 절로 아파왔지만 지칠 때쯤 나타나는 건물들과 잘 조경된 정원들이 나를 계속 움직이게 만들었다.
배가 조금 고파져 공원 벤치에 앉아 아침에 사 온 면을 퍼먹었다. 그새 면이 불었지만 오히려 더 맛있었다. 도시락 아닌 도시락을 먹으며 공원을 구경하니 꽤 만족스러운 한 끼가 완성되었다.
오후부터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지만 다행히 날이 흐리기만 할 뿐 물이 내리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쌀쌀한 날씨 탓에 공원에서 계속 여유를 부리기는 힘들었다. 혹시나 싶어 치마대신 바지를 입은 게 다행이었다.
밥도 먹었겠다 이곳의 또 다른 하이라이트인 신궁전을 가기 위해 움직였다. 양옆으로 날개를 펼친 듯 거대한 궁전은 보는 것만으로도 위세가 대단했다. 저 내부는 얼마나 더 대단할까. 얼른 내부로 들어가 예쁜 것을 보며 몸을 녹이고 싶었다.
당당히 표를 들고 앞에 가니 직원이 나를 막아섰다. 어리둥절한 나를 돌려보내며 친절하게 티켓부스 위치까지 알려준 직원은 얼른 다녀오라며 나를 떠밀었다.
나는 표를 끊었는데? 당황한 나머지 표를 들고 어버버 거리자 다시 한번 '예약'을 해야 한다며 나를 내보냈다. 친절한 직원은 독일어와 영어가 섞인 문장으로 표를 들고 저기 가면 '예약'을 해줄 거라며 웃으며 저 멀리 부스를 가리켰다.
안 그래도 추운데 딱 봐도 멀어 보이는 티켓부스까지 갈 생각에 막막해졌다. 그럼에도 직원이 웃으며 계속 바라보기에 발을 돌렸다. 부러 못되게 대하는 것도 아니고 친절하게 손짓까지 해주는데 안 갈 이유도 없었다.
단체 중국인 관광객을 거슬러 올라가며 티켓부스까지 찾아간 나는 그제야 왜 '예약'이 필요한지 알 수 있었다. 신궁전은 오로지 정해진 시간에 가이드와 함께 입장할 수 있었고 타임별로 인원수가 정해져 있었기에 통합권을 끊었더라도 따로 티켓을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운이 좋게도 바로 다음 입장타임이 찍힌 티켓을 가지고 가자 아까 나를 막았던 직원이 두 팔 벌려 나를 환영해 주었다. 나는 마치 개선장군처럼 티켓을 팔락이며 그에게 다가갔고 가벼운 칭찬과 함께 궁전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신궁전은 기대보다 더 화려했다. 아까 보았던 상수시궁전도 만만찮았는데 신궁전은 한술 더 뜬 화려함이었다. 쾌활한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나아갈수록 입이 절로 벌어졌다. 독일은 다른 유럽보다 화려함이나 장식이 약할 거라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의외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은 금칠로 가득한 방이나 명화가 잔뜩 걸린 갤러리가 아닌 원석으로 꾸며진 방이었다. 마치 물속을 연상시키는 것처럼 조개껍질과 원석으로 장식해 둔 벽은 기묘한 멋이 있어 인상 깊었다.
건물을 나와 맞은편에 있는 대학 건물을 바라보았다. 건물의 생김새는 문화재인데 아직도 학교로 사용되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방금 보고 나온 궁전 같은 화려함은 없겠지만 사용되고 있는 건물 특유의 활기는 가득할 것 같았다.
내부까지 보고 싶었지만 다음 목적지를 위해 포기했다. 아직 보고 싶은 건 많은데 시간이 너무 금방 흘러가 버렸다.
다음 목적지는 이곳까지 와서 안 보고 가면 섭섭한 곳이었다. 정식명칭은 '체칠리엔호프'. 과거 궁전이자 우리에게는 '포츠담회담'의 장소로 알려진 이곳은 현재는 호텔로 사용되고 있지만 일부 구역은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었다.
걸어가기에는 도저히 시간이 안 맞을 거 같아서 버스를 탔다. 정류소를 착각해 한 정거장 먼저 내렸다. 피곤함에 짜증이 치솟으려다 담장을 타고 오른 덩굴하나에 가라앉았다. 작게 핀 꽃을 구경하며 걷자니 겨우 한정거장인데 뭐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수했다고 화낼 시간에 지금 내가 즐길 수 있는 걸 즐기는 게 더 합리적이었다.
박물관을 들어가니 독일에 와서 처음으로 한국어 가이드를 발견했다. 오이오가이드 밑에 적힌 '한국어' 세 글자가 너무나 반가웠다. 확실히 영어로 들을 때보다 더 집중되고 편안했다.
막상 보게 된 회담 장소는 평범했지만 저 안에서 오고 갔던 이야기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입장부터 같이 관람하던 일본인 커플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들과 나는 같은 장소를 보고 있지만 절대 같은 감상을 가지진 않겠구나 싶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조금 피곤했다. 버스와 트램, 지하철까지 무려 3번의 환승을 거치니 몸에 진이 다 빠졌다. 나른해진 몸을 이끌고 주섬주섬 캐리어를 정리했다. 내일 아침에 다시 한번 확인하겠지만 그래도 미리 한번 더 정리해 두어야 마음이 편했다.
내일은 베를린을 떠나 뉘른베르크로 향한다. 5시간 넘게 기차에 앉아있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허리가 걱정되었다.
베를린에서의 첫날만 해도 꽤 오래 머문다 생각했는데 너무 빨리 지나가버렸다. 나중에 또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든다.
베를린에서는 특별하게 강렬한 기억 하나가 아니라 작고 소소하게 빛나는 기억들이 가득해서 마치 길을 걷다가 예쁜 조약돌을 잔뜩 주운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아쉬운 것도 미련스러운 것도 많지만 이제는 다음을 향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