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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단화 Nov 04. 2024

열여덟 유럽일기 024

위선의 변명

2016.09.30

Berlin, Deutschland


 게으름은 언제 피워도 좋다. 부스럭거리는 시트를 뒤집어쓰고 끝도 없이 자다 보니 아침보다는 점심을 먹을 시간이 찾아왔다. 어김없이 자리를 비운 룸메들 덕에 시원하게 환기를 하고 리셉션으로 향했다.

 직원에게 다가가 뜨거운 물을 요청하자 고개를 갸웃거린다. 물이라면 냉장고와 실온에 있는 게 다라며 에비앙을 꺼내주려 하길래 기겁해 고개를 저었다. 나의 목적은 컵라면을 위한 뜨뜻한 물이지 한 병에 6천원 이나 하는 물이 아니었다.


 열심히 머리를 굴리다 챙겨 온 컵라면을 꺼내 드니 직원이 아는 척을 하며 끓는 물을 준비해 줬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물을 기다리는 동안 립셉션을 구경했다. 라운지와 카운터가 함께 있는 건물은 한구석에는 카페도 겸하고 있었는데 아침에는 커피를 팔고 저녁에는 맥주를 팔았다. 맥주를 살 때는 냉장고에서 꺼내주는 것을 바로 받아 몰랐지만 이곳의 커피 머신이 꽤 그럴듯했다. 기회가 된다면 마셔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을 받고 밖으로 나가 자리를 잡았다. 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언어검색을 돌려보니 내가 물을 요청할 때 말했던 'hot water'가 조금 어색한 표현이라고 나왔다. 'boiling water'라고 하는 쪽이 좀 더 자연스러운 표현이었다. '핫 워터'도 대부분 알아듣기는 하지만 오늘의 직원은 '대부분'에 들어가지 않았던 듯했다.


 영단어 하나를 배우면서 먹은 라면은 꽤 맛있었다. 살면서 컵라면이라곤 산에 갔을 때를 제외하면 인연이 없었는데 앞으로는 자주 생각날듯했다. 약간은 춥게도 느껴질 바람을 맞으며 뜨뜻한 라면국물을 마시니 몸이 녹는 기분이었다.


 밀린 판트도 해치우고 물도 살 겸 근처 마트로 향했다. 그동안 쌓인 음료수 병을 기계에 넣으니 1유로 영수증이 찍혀 나왔다. 물도 물이지만 여행을 와서 액상과당을 자주 마시는듯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대신 밖을 싸돌아다닐 예정이라 꼭 필요한 것만 손에 쥐었다. 물 한 병과 사과를 계산하며 판트 종이를 건넸다. 무려 1유로 동전 하나로 오늘의 장보기가 해결되었다. 독일마트 만세! 판트 만세!


 마트를 나와 근처 정류장에서 버스를 올라탔다. 오늘의 목적지에 갈 생각에 절로 다리가 동당거렸다. 30여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베를린에 위치한 동물원이다. 나는 동물을 좋아하지만 동물원 자체는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머리가 굵어질수록 동물을 가까이에서 본다는 만족감보다 동물을 가둬놓았다는 부채감이 더 크게 다가와서였다. 그런 내가 돈 주고 동물원을 찾아온 게 스스로도 낯설었다.


 찾아오게 된 계시는 사소했다. 과거 인터넷에서 다른 동물원들과 달리 베를린 동물원은 동물복지가 잘되어있다는 글을 봤던 것이다. (지금은 한국도 점점 동물원의 시설이 개선되고 동물복지에 대한 인식이 나아지고 있지만 저 때 나는 종종 열악한 동물원에서 폐사한 동물들의 기사를 접했었다.)

 독일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좋으며, 관리하고 있는 동물 또한 많은 곳이었다. 연구나 생물종 보호 목적의 장소에 약간에 관람요소를 넣은 거라면 한번 방문해보고 싶었다.


 14유로가 넘는 거금(?)을 내고 입장한 동물원을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실망'이었다. 뭘 기대했던 걸까. 스스로에게 자문할 만큼 동물원은 별로였다. 처음 입장해서 본 산양의 우리를 볼 때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돌산을 작게 옮겨놓은 우리는 꽤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잘 관리되는 동물원이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멀리서도 잘 보이던 작은 암벽산


 열심히 원내를 돌아다니며 구경하다 보니 여러 동물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일부 동물들이 보이는 정형행동이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좁지 않은 우리에서 침팬지 한 마리가 딱 그 공간만 존재한다는 듯이 구석을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예전에 아쿠아리움에서 본 바다코끼리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충격적이었다. 역시 사람과 동물의 절충안은 없는 걸까. 마음이 불편했다.


 불편함의 정점은 맹수 우리 앞에서 찾아왔다. 사자 한 마리가 엄청나게 아파 보였다. 계속해서 정형행동을 하는 사자의 가죽은 아래로 축 처져있었다.

 가만히 앉아있는 녀석과 달리 다른 사자 하나가 유독 활발했다. 거대한 고양이처럼 호박을 굴리며 놀던 녀석이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나는 맹수 우리 식사시간에 일부러 시간을 맞춰갔다. 관광객들이 시간 맞춰 모여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는 가운데 사육사가 커다란 트롤리를 끌고 나왔다. 사육사가 철장밑의 작은 문을 열어 고기를 던지면 안에 있던 녀석들이 달려와 고기를 뜯어먹었다.


 새까만 털을 가진 재규어가 철장을 빙빙 맴돌았다. 사육사가 고기를 던지니 재빨리 달려가 고기를 낚아챘다. 먹는 걸 가만히 바라보니 아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쪽부터 시작된 배급이 길어질수록 고기 씹는 소리가 공간을 메웠다. 그 순간 건물을 울리는 커다란 포효소리가 들렸다. 기다란 통로 같은 공간이 맹수의 울음소리로 웅웅거렸다. 깜짝 놀란 심장이 두근두근 거리며 뛰었다. 포효의 주인은 잘 놀다가 밥을 보고 흥분한 사자였다.

 인간들은 놀라 수군거리는데 옆에서 고기를 뜯는 표범은 시큰둥한 표정이다. '저거 또 저러네.' 나에게 동물의 마음을 읽는 능력은 없지만 표범의 얼굴이 딱 저런 말을 하고 있는 거 같았다.


 기대했던 것과 달리 식사시간은 빠르게 끝났다. 모든 동물이 고깃덩어리 하나씩을 받자 사육사는 사라졌다. 사자 우리 한편에 누워있던 지쳐 보이는 녀석도 고기를 받았지만 입을 대지는 않았다. 덩그러니 놓인 분홍색 살점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가만히 누워있기만 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베를린의 동물원은 좋은 동물원이었다. 다양한 동물종과 넓은 부지, 시내와 가까워서 접근성도 좋다. 동물원을 바라보며 밥을 먹을 수 있는 레스토랑까지 있었다. 내가 본 어떤 동물원보다 마리당 차지하는 면적이 넓어 보였으며 시멘트대신 흙이나 풀 따위가 각자의 서식지에 알맞게 꾸려져 있었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된 곳은 아니었다.

 동물원의 한계였지만 그래도 기대했던 것이 있는지라 마음이 찜찜했다.


 날이 추워져서인지 폐장시간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야외방사에 있는 동물들이 하나둘 들어갔다. 늦게 입장한 덕에 보려고 한 동물들은 다 보지도 못했다. 특히나 호랑이를 보지 못해 아쉬웠다.

 그래도 돌아다니다 하얀 늑대들을 발견했다. 커다랗고 귀여운 얼굴을 구경하다 보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여유가 넘치던 늑대무리

 기대보다 실망스러워도 동물을 보는 건 기분이 좋았다. 갇혀있는 걸 안타까워하면서도 그렇게 해서라도 그들을 보았다는 것에 기쁨을 느낀다. 참 아이러니하다. 이럴 때는 그냥 '귀엽다'하고 넘어가면 되는 건데 꼭 생각을 두세 번씩 하느라 스스로를 괴롭힌다. 참 피곤한 사람이다.


 돌아다니느라 주린배에 샌드위치하나를 채워 넣었다. 남은 동물들이 들어가기 전까지 열심히 발을 놀렸다. 곰과 코뿔소를 보고 열심히 집을 짓고 있는 비버도 구경했다. 작은 손으로 나무를 옮겨 댐을 만드는 녀석들을 구경하자니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부러 길을 둘러 늑대 무리들을 한번 더 보고 거대한 물소와 그 사촌들을 구경했다. 땅을 걸어 다니는 새들까지 보고 나오니 폐장시간이 코앞이었다. 아쿠아리움까지 보고 싶으면 개장시간에 맞춰 와야겠구나 싶어졌다.


 동물원을 나와 저녁을 사러 이동했다. 9월의 마지막을 맛난 것을 먹으며 보내겠다는 다짐 아닌 다짐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30여분을 걸려 도착한 곳은 저번에 들렸던 피자집이었다. 이번에는 들어가는 토핑을 자세히 읽고 주문을 넣었다. 버섯과 햄이 가득한 피자를 받고 자리에서 게눈 감추듯 해치웠다.


 한번 다녀봤다고 숙소로 걸어가는 길이 익숙했다. 가는 길에 보이는 DM에서 다 떨어진 선크림을 사고 나왔다.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서 구매한 선크림은 주황색 패키징이 마음에 들어서 골랐다.


 숙소로 돌아와 내일 계획을 짜고 밀린 메시지를 확인했다. 벌써 모레면 베를린을 떠난다. 뭐 한 게 없어 보이는데 시간이 지나가고 아직 못해본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떠나야 한다. 분명 바쁘게 다녔는데 아쉬운 것은 그만큼 이 도시가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내일은 좀 더 일찍 일어나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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