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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유럽일기 029

다름과 틀림 사이

by 강단화

2016.10.05

Bamberg, Deutschland


일행이 생긴 다는 건 선택과 결과를 공유한다는 것이다. 모든 걸 함께할 의무는 없지만 같은 방에서 같은 곳으로 가는 일정이라면 자연스럽게 많은 것을 같이 공유하고 결정하게 된다. 어쩌면 난 이 당연한 사실의 무게를 간과하고 있었다.

단순히 목적지만 같아서 일정을 공유한 대가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이르지만은 않은 아침 눈을 뜨고 외출을 준비했다.
날씨는 화창한데 공기가 차가워 몸을 얼렸다. 이제껏 버틸만한 날씨만 맛보았던 터라 오늘도 버틸 수 있을 거라 안일한 믿음을 가지고 옷을 챙겨 입었다.

겨울을 끼고 하는 여행이었지만 다음 도시는 스페인이었기에 두꺼운 옷은 버티고 버티어 다시 돌아오는 독일에서 사고 싶었다. 1g이라도 캐리어 무게를 줄여보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뉘른베르크를 떠나 s반을 타고 밤베르크에 도착했다.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느껴지는 찬공기에 아차 싶었다. 옷을 여며보지만 햇빛이 닿지 않으면 한기가 올라왔다.
최대한 응달을 피해 걸으며 그래도 걷다 보면 몸이 녹을 거라 스스로를 달랬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작은 도시는 초입부터 마음에 들었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을 지나치며 한참을 귀엽다는 소리를 내뱉은 것 같다. 같이 간 동행 B 역시 귀엽다며 사진을 몇 방 찍고는 발을 옮겼다.

도시마다 하나씩 있는 관광 센터에 들려 초록배경 사이로 관광지가 표시되어 있는 귀여운 지도를 챙겨 나왔다.


구글지도 대신 종이지도를 보며 걸음을 옮겼다. 기온이 낮기는 했지만 구름을 뚫고 오는 햇살이 보기 좋아 길을 걷는 내내 감탄이 나왔다.

딱 살기 좋은 유럽마을이란 감상이었다.


20161005_111755.jpg 지도를 가지고 나와서 본 풍경


도시의 트레이드마크인 다리 위 구시청사를 구경하고 광장을 구경했다. 출출해지는 배를 채울 겸 야외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B는 닭고기를, 나는 커리부어스트를 주문했다.


간단한 식사를 하며 다음 목적지를 찾았다. 올드타운을 보고 성당으로 가자는 나의 제안에 B는 괜찮다며 동의를 표했다. 그러면서 쇼핑을 하고 싶다고 가는 길에 백화점이나 의류상점이 있으면 들렀다 가자는 제안을 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기자기한 올드타운을 구경하고 한쪽 첨탑이 공사 중인 성당으로 향했다. 아직까지는 성당을 볼 때마다 신기했으므로 구석구석 눈을 돌리느라 바빴다. 크지 않은 성당 내부 한구석에 관광객과 신자들이 피어놓은 초가 보였다.

반짝이는 게 예뻐 나도 하나 해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보이는 촛불 옆에 적힌 2유로 표시에 조용히 마음을 접어 넣었다.

초를 켜서 소원수리함에 의견을 넣는 것보단 기도로 1 대 1 채팅을 쏘는 게 좀 더 내 취향이었다. 절대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20161005_135808.jpg 한쪽 첨탑이 공사 중이던 성당


오래된 건물들도, 도시를 걸어 다니며 풍경을 구경하는 것도 즐거웠으나 점점 떨어지는 기온과 아직 회복되지 않은 몸이 따뜻한 공간을 요구했다.


마침 B가 다시금 쇼핑을 하고 싶다고 피력했기에 우리의 목적지가 설정되었다.

나를 배려해 준 것인지 아니면 본래의 목적인지 모르겠지만 B는 쇼핑몰을 찾는데 적극적이었고 우리는 금방 따뜻한 매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밤베르크에 도착한 순간부터 너도 옷을 하나 사라고 말하던 B는 옷가게에 들어오자마자 신나게 옷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가격과 디자인등 이것저것 따져보던 그는 나중에 가서는 매장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코디를 신경 쓰기 시작했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가끔 옷을 '못 입는'사람들을 보곤 했다. 나 역시도 패션센스가 뛰어나다 말할 수 없지만 (특히나 이때의 나는 패션센스가 극악을 달리고 있을 때였다.) 객관적으로 보기 좋은 신체를 가지고 이상한 옷을 입으면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했다.


마치 비빔밥을 비벼먹지 않고 나물을 하나씩 건져먹는 외국인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것이 엄청 틀린 방법은 아닌데 그렇다고 맞는 방법도 아닌, 그래서 '제대로 된' 방법을 알려주고 싶은 기분 말이다.

물론 무슨 옷을 어떻게 입든 그건 개인의 자유다. 타인이 나에게 '예쁘게'보여야 할 이유도 없다. 그럼에도 마음속에서 불쑥 그 옷 말고 하다못해 이 셔츠를 입으면 안 될까? 싶은 기분이 들곤 했다.


만약 내가 혼자였다면 조용히 생각만 하며 괴로워했을 거고 동생과 여행했다면 어울릴만한 코디를 동생에게 말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날 만난 모르는 사람과 함께한다면 나는 분명 입을 다물 것이다.

B는 나와 달랐다. 내 옆에서 끊임없이 사람들의 센스를 평가했다. 더 좋은 점을 찾고 보안점을 말한다면 모를까, 나는 느끼지도 못한 단점만 가득한 지적에 조금씩 지쳐갔다.
그리고 이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나 역시도 패션이 꽤 엉망인 사람이었고 설령 내가 옷을 잘 입는다 하더라도 B와 추구하는 스타일이 다르다면 쓰디쓴 혹평의 대상일 게 분명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B는 내게 분홍색 니트를 골라주었고 나는 추운 날씨와 컨디션을 위해 지갑과 타협을 봤다. 의도치 않은 지출이었지만 필요한 지출이었다.


평소라면 살 생각도 못했을 분홍색의 니트를 손에 쥐니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옷에 크나큰 호불호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유독 니트류는 손이 안 갔다. 따뜻한 남쪽에 살아서인지 갑갑한 걸 싫어해서인지 나는 그 흔한 니트 하나 없이 몇 년을 살고 있었다.


여행을 와서 새삼스러운 일을 많이 하게 된다. 싫은 기분은 아니지만 내가 안 하던 짓을 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묘한 감상을 느끼게 된다.


계산을 마치고 입고 있던 옷 위에 니트를 껴입었다. 한층 두꺼워진 옷이 추위를 막아주었다.
계속해서 자신의 눈썰미를 칭찬하며 제가 골라준 옷이 마음에 드냐 물어보는 B에게 나는 몇 번이고 마음에 든다고 골라줘서 고맙다고 대답했다. 거짓은 아니었지만 과장이었다.

니트는 따뜻하고 좋았지만 B가 말하는 것처럼 "제일 따뜻하고 귀여운 니트"는 아니었다. 생각보다 얇은 두께는 한겨울에는 입지 못할 것 같았고 어중간한 핏은 나의 몸을 부 해 보이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자신이 추천해 준 옷을 산 친구들이 얼마나 만족했는지 또 얼마나 자신에게 고마워했는지를 얘기하는 B앞에서 초를 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내 옷보다는 좀 더 긴 고민 끝에 B 역시 마음에 드는 옷을 하나 고르고 나왔다.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는데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는지 나오는 순간부터 불평이 쏟아져 나왔다. 부러 실내에 들어가자 말하지는 않았지만 혹여나 나를 신경 쓰느라 실내로 들어가 시간을 날린 것일까 걱정이 되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타인의 발목을 잡았을지도 모른다는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결이 맞지 않는 사람과 함께한 동행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또다시 시가지를 구경하고 당을 충전하러 카페에 들르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공용공간에서 들리는 한국어에 자연스럽게 합석이 이루어졌다. 오는 길에 사 온 맥주 한 캔을 까고 소란스러운 수다를 이어갔다.

재밌지만 조금 피곤한 대화를 이어나가다 유독 맛이 없는 맥주에 결국 반 캔밖에 마시지 못한 맥주를 비워버렸다. 다를 때 같으면 싱크대로 흘러가는 술이 아깝겠지만 오늘은 유독 맛없는 술에 대한 미미한 분노마저 느껴졌다.


혼자서 싱크대에 기대 맥주를 버리는 나를 빤히 바라보던 남자가 말을 걸었다.


"그거 왜 버리는 거야?"

"맛이 없어. 이건 먹지 마"

"다른 거 추천해 줄 만한 거 있어?"

"단거 좋아하면 라들러 마셔봐. 난 그게 제일 좋은 거 같아."


싱크대 앞에서 짧은 문답을 나누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아는 사람이냐고 물어오는 옆자리 한국인에게 고개를 저어줬다.

모로코출신의 그 남자는 며칠째 아침마다 얼굴을 보고 있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오늘의 문답이 가장 긴 대화였다.


문득 여기 앉아서 노는 것보다 저 모로코 남자에게 말을 거는 게 더 나을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심도 없는 연예인과 면세점이야기보다는 한 번도 못 가본 모로코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게 더 재미있었을 것 같았다.

익숙한 소리에 이끌려 관성적으로 앉아 술을 깐 스스로가 한심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고 이야기의 주제가 항상 새로운 것은 아닌가 보다.


밤베르크는 좋았지만 동행이 없었다면 더 편했을 것이다. 한국인들과의 수다는 익숙했지만 외국인과 대화를 나눴다면 더 흥미로웠을 것이다. 일장일단이라지만 단이 좀 더 크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지나간 것은 별 수없으니 찾아올 다음을 기약했다. 내일은 또 새로운 도시로 향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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