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쑥 찾아오는 불온에
어제저녁부터 몸이 불안 불안하더니 결국 일이 터졌다.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오늘의 계획을 전부 리셋시켰다. 으슬으슬 떨리는 몸과 덮쳐오는 복통, 두통을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나둘 본인의 일정에 맞추어 여행자들이 떠나가고 나 홀로 침대에 누워있으니 커다란 방을 내가 다 전세 낸 기분이었다. 옷을 껴입고 꾸물꾸물 이불로 고치를 만들어 눈을 감았다. 하루하루가 소중한 시간인데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되나 싶은 자괴감이 찾아왔다.
분명 프랑크푸르트에서 이미 결론을 낸 질문이라 생각했는데 몸이 약해지니 불쑥불쑥 잡생각이 치고 들어왔다. 잘 쉬어야 잘 놀 수 있는 거라며 스스로를 달랬다. 껴입은 옷 너머로 느껴지는 한기가 날씨 때문인지, 서러움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오후 늦게까지 자고 일어나니 새로운 숙박객이 나타났다. 역시나 또 한국인이길래 가벼운 인사를 나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시내구경을 같이 하기로 했다. 조금 일찍 들어온 옆침대 언니까지 함께해 얼결에 3명이서 저녁까지 먹으러 가게 되었다.
반나절을 날린 덕에 컨디션은 확실히 좋아졌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옷을 꽁꽁 겹쳐 입고 뉘른베르크 시내를 구경했다. 어제 에니카와 올랐던 성곽도 다시 올라가 보았다. 어제와 달리 흐린 날이 조금씩 개어가고 있어 좀 더 넓은 시야로 시내를 볼 수 있었다.
시내를 구경하고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전날 추천 아닌 추천을 받은 곳이자 한국인들에게 이미 잘 알려진 소시지 집이었다. 내가 혼자라면 절대 가지 않았을 것 같은 분위기와 리뷰였지만 동행인 언니 둘이 가고 싶어 했고 나 역시 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별말 없이 긍정을 표한 곳이었다.
또 궁금하기도 했다. '남들 다 하는 거'를 해본 경험이 별로 없는 나에게 찾아온 '남들 다 하는 여행 와서 유명한 식당에서 밥 먹기'를 해볼 기회였기에.
자리에 앉아 주문을 기다렸다. 이런저런 수다꽃이 피고 각자의 여행담이 테이블을 오갔다. 화기로운 분위기 속에 점점 배가 고파졌다. 착석한 지 30분이 지나도록 서버가 찾아오질 않았다. 내가 보며 걱정했던 구글리뷰가 나의 일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남들 다 하는 여행 와서 유명한 식당에서 밥 먹기'를 피한(?) 이유는 별게 아니었다. 그냥 진짜 나랑 안 맞았다. 인터넷에서 유명하다 하는 식당들은 죄다 타이밍이 어긋나거나 나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았다.
나는 한 끼에 4-5만 원을 태울 수 있을 만큼 넉넉하지 않고 가성비가 괜찮다 싶으면 웨이팅을 걸거나 불친절하다는 리뷰가 있었다. 특히나 언어가 자신 없는 상태에서 일반적인 불친절과 인종차별을 구분하지 못하는 나는 굳이 내 돈 주고 불쾌감을 사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갈 수 있는 가게는 굉장히 적어졌고 그럴 바에는 오프라인 추천이나 그냥 구글 맵 평점이 좋은 곳을 이용하게 되었다.
그렇게 어찌어찌 '식당에서의 불쾌한 경험'을 피하고 있던 내게 첫 한국인 동행과의 식당에서 걸려버린 것이다.
필사적으로 눈을 마주치려 굴어도 서버들은 우리를 본체만체했다. 일자체가 바빠 보이기는 했기에 초반 30분까지는 이게 인종차별인지 그냥 바쁜 건지 감도 잘 안 왔다. 다만 나는 구글 리뷰에서 비유럽 관광객, 특히나 동양인의 주문을 늦게 받으러 온다는 리뷰를 읽었고 그렇기에 일행들보다 조금 더 빨리 불쾌했다.
30분이 넘어가자 일행 중 눈치가 빠른 언니 쪽이 구글 리뷰를 훑었다. 불쾌했지만 굳이 분위기를 깨기는 싫은지 애써 덤덤한 척 오히려 좋다고 말을 꺼냈다.
'주문 안 받으면 식당만 손해지! 우리는 오래 앉아있고 좋아'
약간의 비웃음도 걸쳐있던 그 웃음이 기억에 남았다.
기다린 지 1시간이 되어서야 우리는 서버를 만날 수 있었다. 너무 바쁘다면서 웃으며 오는 서버가 얄밉기도 했다. 메뉴는 이미 정해놓은지 한참이었기에 주문은 금방 끝났다. 그리고 음식은 얼마나 기다려야 받을 수 있을지 두려워질 때쯤 맥주가 나왔다.
타는 목을 시원하게 축이고 잔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음식이 나왔다. 주문이 들어간 지 5분 남짓한 때였다.
10분이 채 걸리지 않은 시간에 우리 셋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바라봤다. 이쯤 되면 가게가 진짜 바빴거나 소시지를 초벌 하는 시간 때문에 주문을 안 받은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날 서버가 왜 그렇게 우리에게 오지 않았는지 이유는 모르지만 일단 음식은 나쁘지 않았다. 짭조름한 소시지를 새콤한 자우어크라우트(양배추발효음식)와 함께 베어 물면 육즙이 가득 터졌다. 단번에 소시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되었다. 다만 나에게는 조금 짰다.
나는 감자샐러드가 제일 맛있었다. 독일은 맥주와 소시지의 나라라고 하지만 내 생각에 독일은 감자의 나라다. 어딜 가든 사이드로 나온 감자가 실패하는 법이 없다.
소시지로 짜디짜게 변한 입에 새콤한 감자샐러드나 자우어크라우트를 넣어주면 육즙에 쌓인 채소가 단맛을 내었다. 이어서 시원한 맥주까지 목구멍으로 넘겨주면 소시지를 몇 접시든 계속 먹을 수 있을 거 같았다.
맥주 한잔과 소시지 한 접시에 기분이 풀렸다. 배부르게 먹고 값을 치르고 나왔다. 계산도 한참이나 걸려 이대로는 무전취식도 가능하겠다 싶을 때쯤 영수증을 받았다.
2시간이나 걸린 식사는 배부르고 맛있었지만 묘하게 찜찜했다. 일행 중 한 명은 맛있었지만 굳이 추천하거나 재방문을 하지는 않을 거 같다 말했고 다른 한 명은 우리가 너무 예민한 거라며 좋은 게 좋은 거니 다 괜찮은 거다 했다.
새삼 줏대를 가지는 건 꽤나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주류 의견에 반대하거나 가까운 사람과 의견이 다를 때는 더더욱 소리 내기가 힘들겠구나 싶었다.
소시지 한 접시에도 의견이 각양각색으로 갈린다. 참 번잡스러운 세상이다.
숙소로 돌아와 내일을 준비했다. 근교 소도시를 방문하기로 정하고 간략하게나마 루트를 짰다. 그러다 같은 곳을 가려한다는 같은 방 언니와의 동행이 이루어졌다. (이하 편하게 B로 지칭하겠다.)
그전까지 종종 부분약속을 잡아본 적은 있지만 하루를 통째로 함께하는 건 에니카를 빼곤 처음이었다. 에니카는 '여행자 동행'이라기보다는 '손님투어'에 가까웠기에 B와 가는 동행이 새로웠다.
걱정과 불안 반, 설렘 반을 끌어안고 자리에 누웠다. 내일은 날씨가 좋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