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비와 동행
오늘도 우중충한 날씨였다. 아무리 여행이 날씨를 탄다지만 독일은 특히나 더 그런 듯하다. 습기를 머금고 늘어지려는 몸을 재촉하면서 숙소를 나왔다.
똑떨어진 생수를 구매하려 약속시간보다 일찍 중앙역으로 향했다. 평소 같으면 최대한 싼 마트를 찾아갔겠지만 오늘 10월 3일은 독일의 통일기념일로 국가공휴일이었다. 빨간 글씨로 구글지도에 휴무일이라 떠있는 마트들을 보다 울며 겨자 먹기로 중앙역 슈퍼마켓을 찾았다.
지나가며 두어 번 쳐다본 슈퍼마켓 브랜드는 모든 물품의 평균가격에 점을 하나 뒤로 찍은듯한 가격표를 달고 있었다.
무려 생수를 2.24유로를 주고 구매했다. 판트까지 붙어 0.5유로의 물을 마시다가 1리터에 2유로가 되는 물을 사려고하니 손이 조금 떨렸다. 다만 인생사 새옹지마라 하지 않았는가. 2유로를 주고산 물은 내게 너무너무 간절했던 물맛을 보여주었다.
브랜드명 뒤로 초록색 산이 그려져 있던 병은 이름마저 묘하게 화산을 떠올리게 했다. 고른 물이 탄산수만 아니어도 감지덕지인 독어 까막눈이지만 '이건 화산수다'라는 삘이 꽂혔다.
계산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뚜껑을 따 물을 마셨다. 마치 삼다수와 같은 청량함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2유로짜리 뽑기의 성공이었다.
그 뒤로 나는 그 브랜드의 물을 찾아다녔다. 다행히 일반 마켓에서는 꽤나 합리적인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마트에서 그 브랜드가 없다면 번역기를 돌려 '화산'이란 단어를 찾아 구매했다.
20년 가까이 한 종류의 물에 길들여진 입은 유럽에서까지 같은 물을 마시기를 원했다. 별수 없이 나고 자란 환경의 영향이다.
어제 에니카를 만난 곳에서 또다시 에니카를 만났다. 가볍게 시내를 돌아다니며 얘기를 나눴다. 빠르게 흘러들어오는 영어에 머리가 어질어질했지만 어찌어찌 주제를 따라잡아 대꾸를 건넸다. 다행스럽게도 인내심이 높은 동행덕에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소나기도 아니고 안개비도 아닌 비가 스치듯 지나가고 우리는 눅눅해진 몸으로 카이저부르크를 올랐다.
신성로마제국 때 황제의 거성이자 도시의 방벽으로 만들어진 카이저부르크는 역할이 역할인지라 높은 곳에 건축되어 있었다. 살짝 춥고 굳어있던 몸이 돌길로 이루어진 언덕길을 오르자 서서히 풀려갔다.
오르막을 오르는 건 조금 힘들었지만 올라서 내려다보는 시내는 아름다웠다. 빨간 지붕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풍경은 꽤 귀여웠지만 날이 좋은 날에도 와보고 싶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구시가지는 특이하게도 교회보다 높은 건물이 없었는데 그 점이 조금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국교가 있는 나라는 멸망하고서도 그 흔적을 여기저기 남겨놓는구나 싶었다.
성곽에 올라 풍경을 구경하다 길을 따라 내려왔다. 박물관 내부는 에니카도 나도 큰 흥미가 없기에 건너뛰었다. 에니카는 이미 많이 봤던 곳이라서, 나는 궁보다는 다른 곳을 에니카와 함께 가고 싶어서였다
한산한 골목에서 유일하게 문이 열린 가게로 들어갔다. 우연찮게도 피자와 샐러드를 파는 식당이었다. 역시나 나는 피자 두 조각을, 에니카는 커스텀한 샐러드볼을 받아 들었다.
주인아저씨의 열렬한(?) 호객덕에 두 조각을 샀기는 했지만 한 번에 다 먹기에는 무리였다. 피자 한 조각이 보통의 피자 2조각을 합한 것만큼 커다랬다.
점심을 먹으며 얘기를 나누었다. 에니카의 여행이야기와 가족이야기를 들으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내가 조금 편해진 것인지 점점 빨라지는 에니카의 말속도에 정신을 놓으면 순식간에 주제를 놓치게 되었다.
친지 중에 한국인이랑 결혼한 사람이 있다고 한 에니카는 한국에 대해서도 여러 질문을 건넸다. 그중 스스로 생각하기에 조금 'Funny'한 질문이라며 나에게 매운 것을 잘 먹는지 물어보았는데 나의 대답은 '그런 거 같다.'였다.
정확지 못한 대답에 대한 변명으로 비교군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말을 이으니 에니카는 자신이 본 한국인이 가족행사에 고추장 튜브를 들고 와서 놀랐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며 그게 '일반적'이냐고 묻기에 나는 조금 애매하게 웃으며 '그런 것 같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편견을 강화해주고 싶지는 않지만 나 역시 그 '고추장 튜브'를 들고 여행을 왔다는 말에 에니카는 크게 웃었다.
그리고 나는 신난 에니카의 물음에 답하며 피자 위로 스리라차 소스를 듬뿍 뿌려 먹었다.
결국 손도 대지 못한 두 번째 조각을 포장하고 숙소로 향했다. 다음 목적지로 향하는 길이기도 하고 무거운 물도 내려놓을 겸 에니카에게 양해를 구했다.
텅 빈 숙소에서 가방을 정리하고 캐리어를 열어 한국에서부터 곱게 챙겨 온 엽서책을 꺼내 들었다. 고향의 풍경이 예쁘게 수놓아진 엽서들을 꺼내 에니카에게 건네주었다.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 선물이야."
안경뒤의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에니카는 왜 내게 주냐고 물었다. 나는 여행 중 만나는 친구에게 선물을 주는 게 내 버킷리스트라고 답했다. 그리고 엽서 속 풍경들을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내 집 근처, 자주 가던 바닷가, 추억이 있는 장소. 나의 이야기를 듣던 에니카는 고민 끝에 한 장을 골랐고 나는 그걸 엽서책에서 뜯어주었다.
가벼운 가방과 함께 다시 길을 나섰다. 우리의 목표는 내가 뉘른베르크에서 꼭 보고 싶었던 나치전당대회장이었다. 에니카는 선뜻 나의 일정에 동행해 주었다.
도착한 건물은 거대했다. 부지 또한 넓어서 대회장 옆으로는 나치의 역사에 관한 박물관이 조성되어 있었다. 아쉽게도 영어를 제외하고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는 없었기에 영어로 오디오가이드를 들었다. 에니카와 각자 가이드를 빌리고 내부를 구경했다. 짧게 머무를 거란 예상대신 의외로 풍족한 전시물에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영어 듣기 평가와 역사공부를 동시에 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게 나에게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걸 여행을 하면서 알게 되는 것 같다.
좀 더 천천히 주변도 보고 싶었지만 일행이 있기에 빠르게 지나쳤다. 근처 호숫가와 그곳에 히틀러가 지었다는 건물을 보고 싶었지만 날씨도 안 좋고 관람보다는 에니카와의 대화가 더 중요할듯해 포기했다. 아마 다음기회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고, 단 한 번만 가능하니 전부 다 보자고 욕심을 부리면 결국 지치고 후회하게 될 것이다. 다음이 있다는 생각으로 움직이자 조금 더 편안하게 여행을 바라보게 되었다.
전시관을 둘러보다 내부에서 전당대회장을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어 나가 보았다. 한눈에 안 담길 듯 둥글게 펼쳐진 건물이 인상 깊었다. 뉘른베르크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수식어들이 있다. 나치전당대회, 전범재판, 그리고 히틀러가 사랑한 도시.
자신이 만들어낸 거대한 제국을 바라보며 히틀러가 어떠한 감상을 느꼈는지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다. 다만 이 거대한 공간을 자신을 광적으로 따르는 이들로 채워 넣고 싶어 했다는 것을 보면 어마어마한 애정결핍이 아니었나 싶다.
관람을 하며 에니카에게 조금 불편할 수 있는 내용들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에니카는 꽤 흥미롭고 즐거웠다며 나의 감상을 물어왔다. 그는 나치와 그들의 범죄들에 대해 가볍게 대꾸했지만 그렇다고 그곳에서 본 나치의 만행들을 축소하거나 타자화 시키지도 않았다. 이미 일어난 범죄를 역사라는 이름으로 인식했을 뿐이다. 그리고 약간의 자기반성과 과거에 대한 혐오를 내비쳤다.
독일인과 나치를 주제로 대화를 해보는 것은 처음이라 꽤 새로웠다. 그리고 어떠한 면에서는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나는 "나라"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고 있을까?
여러 이유로 이리저리 치이던 신세였지만 그렇다고 "대한민국"이 역사에서 결백하냐고 묻는다면 난 아니라 생각한다. 애초에 그런 "나라"가 존재할까 싶기도 하다.
다만 현대에 가까이 와서 일어난 비극들은 비교적 또렷이 기록되고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난 처음으로 가해자의 입장에서 교육받은 사람을 마주하게 되었다.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따뜻한 커피 한잔을 손에 들고 에니카와 인사를 나누었다. 반나절이었지만 그보다 더 길게 느껴진 즐거운 동행이었다. 앞으로의 여행에 대한 덕담을 듣고 몇 번을 건네도 아쉬운 감사인사와 작별인사를 건넸다.
내가 즐거웠던 것만큼 그도 즐거웠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녁이 되기 전에 숙소로 돌아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하루종일 추움과 보통을 오갔더니 감기 기운이 솔솔 올라오는듯했다. 컨디션도 썩 좋을 때가 아니라 그런지 침대에 걸터앉자 모든 게 무감각해졌다.
저녁은 숙소에서 만난 한국인 남자분과 함께 먹기로 했는데 그분이 뮌헨으로 갔다가 시간 내에 돌아오는 열차를 놓쳤다. 아마 같이 간 사람들과 맥주를 마시느라 놓친듯했다. 약간의 미안함을 표하는 카톡에 괜찮다며 재밌게 놀라 대꾸했다.
사실 지금 몸 상태로 어제 만난 한국인들을 만나면 굉장히 많이 피곤할 거 같았다. 파투난 약속이 고마워지는 컨디션이었다. 점심에 포장해 온 피자와 맥주 한 캔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역시 혼자가 더 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