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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유럽일기 061

아쉬움은 남기라고 있는 법

by 강단화

2016.11.27 - 28

Würzburg, Deutschland

Rothenburg ob der Tauber, Deutschland


어제의 늦은 취침에도 무사히 아침 기상을 마쳤다. 오늘은 근교도시를 두 개나 갈 계획이었기에 나름 부지런을 떨며 호스텔을 나섰다. 그럼에도 조금씩 늦어진 일정은 어쩔 수 없지만 10시 전에 기차를 탄게 어디냐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1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첫 번째로 도착한 곳은 뷔르츠부르크였다. '로만틱 가도'의 첫 시작 도시로 잘 알려진 이곳은 화려한 레지덴츠과 산중턱에 위치한 요새가 유명한 도시였다. '로만틱 가도'라는 이름은 '로마로 가는 길'이란 의미로 뷔르츠부르크에서 시작돼 디즈니성으로 유명한 도시인 퓌센에서 끝난다. 처음에는 '낭만'을 뜻하는 로만틱인 줄 알고 도대체 독일에서 웬 로맨스인가 싶었지만 진짜 뜻을 듣고 나니 이쪽이 좀 더 독일에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일도 충분히 낭만 있기는 했지만, 그것을 '가도'로 만들 만큼은 아니었다.


처음 계획을 짤 때에는 주교관인 레지덴츠와 산 위의 요새, 시내 구경까지 알뜰히 다 볼 생각이었지만 조금씩 밀린 시작 시간과 이후에 갈 도시를 포기할 수 없어서 요새는 다음 기회로 미루게 되었다. 아쉽긴 하지만 내 체력과 시간의 한계를 알고 있기에 내린 선택이었다.


기차를 타고 도시에 도착해 설렁설렁 시내구경을 하며 레지덴츠로 향했다. 멀리서도 모이는 화려한 자태에 '내가 지금 들어가는 곳이 독일 왕조의 궁전이었나.'를 고민하게 될 정도였다.(알고 보니 왕실과 연관이 없진 않았다. 궁전의 주인은 주교 겸 대공이었다.) 입구부터 온몸으로 화려함을 뽐내는 건물은 배낭을 벗고 깔쌈한 양복을 찾아 입고 들어가야 할 거 같은 분위기였다. 야상을 입고 흙 묻은 운동화를 끌고 들어가는 게 눈치가 보였다. 아무도 눈치 주지 않았지만 뻘쭘한 모양새로 티켓부스 앞에 가서 서니 직원이 대뜸 학생이냐고 물었다. 정직과 거짓사이에서 동공을 떨고 있자니 답을 듣기도 전에 바로 이어서 나이가 몇이냐고 물어왔다. 18살이라 답하자 직원이 쿨하게 프리 엔터라며 손짓했다.

여권도, 학생증 검사도 없이 액면가 하나로 인정받고 무료입장을 했다. 신나서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땡큐를 말하는 목소리가 절로 높아진다. 돈 굳었다는 감정만큼 날 기쁘게 하는 감정도 드문 것 같다.

그날의 레지덴츠를 단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화려함'이었다. 눈을 돌릴 때마다 튀어나오는 대리석과 부조들과 그림들은 보기 좋게 어울리며 온몸으로 자신들이 얼마나 빛날 수 있는지를 증명했다. 건물이 워낙 넓어 한창 구경을 하다 보면 화려함에 무던해질 만도 한데 익숙해질 만하면 새로운 게 튀어나와 사람을 감탄하게 만들었다. 뷔르츠부르크 레지덴트는 이제껏 봐온 독일의 건물들 중에서도 화려함을 말한다면 손에 꼽았다. 그리고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본 가장 독일스러운 건물들 중에서도 손에 꼽았다.


처음 독일을 오기 전에 '독일'하면은 딱딱함, 직선, 철학, 노잼. 등의 단어의 색이 있다면 무채색일 단어들이 먼저 떠올랐는데 여행을 하면서 느낀 것은 독일은 꽤나 다양한 색의 나라라는 것이었다. 단지 그 색들의 톤이 너무 비슷하고 채도가 낮기 때문에 겉으로는 무채색의 나라로 보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이 나라에서 반짝이는 풍경을 볼 때마다 더 눈이 갔다. 그건 때론 강물에 부서지는 햇살이기도 했고, 낯선 외국인을 향한 친절이기도 했으며 격동의 시대를 버텨낸 역사이기도 했다.


아름다운 건물은 2차 세계대전당시 반파되었었다. 지금 볼 수 있는 화려한 건물들은 전쟁 이후 복원된 모습이었고 그 후 복원된 모습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우아하고 세련된 마감과 미감이 복원덕인지 본래부터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름답단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특히나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 거대한 홀은 방문객 모두가 입을 벌리고 천장을 바라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냥 가서 보는 것보다 공부를 하고 가면 더 재밌을 거 같은 건물이었다. 수많은 그림과 조각에는 다 이야기가 있기 마련이었고 나는 그들의 이야기는 1할도 읽어내지 못했지만 더 많은 걸 공부하고 갔으면 더 많은 이야기를 볼 수 있었겠구나 싶었다. 충분히 즐거웠지만 더 큰 즐거움이 있었을듯한 기분이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가득했던 상점가

레지덴츠를 나와 정원을 걸었다. 넓고 잘 정돈된 정원에는 겨울이라 꽃이 많진 않았지만 꽃이 만발하면 얼마나 아름다울지 상상이 가는 곳이었다. 산꼭대기 요새 대신에 정원을 산책하다 길을 나섰다. 기차역으로 가는 동안 스쳐 지나가는 시내를 구경했다. 기차를 타고 한 시간 정도 달리니 오늘의 내 두 번째 목적지이자 역시나 로만틱가도의 일부인 로텐부르크에 도착했다.


기차역에서 나와 시내를 구경하다 보니 그리 크지 않은 마을이었지만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특히나 일본인 관광객들이 눈에 띄게 많았는데 그에 맞춰서인지 가게 곳곳에도 일본어 안내판이 붙여있었다. 이곳에서의 나의 목적은 단순했다. 슈니발렌(Schneeballen). 오로지 그 때문은 아니었지만 요새를 포기한 이유에는 이 과자를 먹기 위함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름을 직역하면 '눈덩이'인 과자는 둥그런 모양으로 반죽을 튀긴 과자를 망치로 부수어서 먹는 이 지역 전통 특산품이었다.

아기자기한 가게에 들어가 과자 두 덩이를 샀다. 바로 먹을 거라 하니 종이봉투에 담겨 나온 과자는 듣던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귀여운 동글동글한 모양은 같았지만 굳이 망치로 부수지 않아도 될 말 큼만 단단했다. 가게에서 나무 방망이를 기념품으로 팔고 있었는데 샀다면 꽤나 억울해질 경도였다. 손으로 부셔 트리니 파삭 거리며 쪼개진 과자는 내겐 조금 달고 느끼했지만 한 번쯤은 먹어볼 만한 맛이었다. 무엇보다 동화 같은 아기자기한 건물들을 배경으로 이색적인 과자를 먹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재밌는 경험이었다.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상점가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활기찼고 빨강과 초록으로 장식된 거리는 옛날이야기 속 삽화 같았다. 과자를 먹으며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오늘 본 첫 번째 도시에서 독일의 제국적 모습을 보았다면 두 번째 도시에서는 독일의 마을을 보았다. 어느 쪽이든 마음에 들어 눈이 호강한 하루였다.


숙소로 돌아와 다음 계획을 짜다가 문득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요 3개월간 하루하루 숙소를 잡고 일정을 새우는 게 일상이 되었는데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무얼 해야 할지 고민스러워졌다. 앞으로의 일을 고민해 봐도 뚜렷이 나오는 건 없다. 그저 뭐든 다시 시작해 봐야지.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낮의 마켓도 나쁘지 않았다.

뉘른베르크에서의 마지막 날인데 그저 시내구경만 했다. 날이 너무 좋아 오늘 로텐부르크를 갔더면 더 멋진 풍경을 보았겠구나 싶었지만 아쉬움은 남기라고 있는 법. 완벽을 찾는 것보단 일단 끌리는 걸 시작하는데 더 의의를 두기로 했다. 이제는 햇살이 비춰도 춥다는 감각이 더 크다. 가을옷을 겹겹이 입고 동네를 어슬렁거렸다. 날씨가 워낙 좋으니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이제는 익숙해진 길을 걷다 보니 절로 생각이 많아졌다. 월요일인 오늘, 금요일엔 한국으로 떠난다. 나름 여행의 큰 버킷 리스트를 하나 지웠지만 아직도 내가 무얼 하고 싶은 것이지 무얼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저녁에 룸메이트로 만난 한국분과 마켓을 한번 더 구경했다. 유학생이라는 언니에게 한국에서 가저온 믹스커피 한 박스를 나눔 하고 와인과 소시지를 얻어먹었다. 믹스커피의 대가치곤 꽤 큰 거 아닌가 했지만 진지하게 여기서 믹스커피는 이 정도 가치가 있다 말하는 얼굴을 보니 좋은 게 좋은 거란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수다를 떨다 보니 언니에게 철없는 티를 많이 낸 듯했지만 여러모로 재밌는 저녁이었다. 덕분에 남은 시간 중 하루를 알차고 즐겁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뭘 할지는 잘 모르겠고 그저 내게 주어진 시간을 즐겁게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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