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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유럽일기 062

처음과 같은 그곳에서

by 강단화

2016.11.29 - 12.01

Frankfurt am Main, Deutschland


마지막 도시이동을 위해 캐리어를 싸고 숙소를 나왔다. 얼마나 되었다고 익숙해진 길을 따라 걸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수많은 도시로 갈라지는 버스들 사이에서 나의 목적지인 프랑크푸르트행을 찾아 올라탔다. 길게 이어지는 이동시간과 중간중간 스쳐 지나가는 낯익은 도시들의 이름에 내가 조금 어이없는 루트로 여행을 하긴 했구나 싶어졌다. 처음 여행 계획을 잡을 때만 해도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는 가우디의 말을 여행루트에 적용시킬 줄은 전혀 몰랐다. 지그재그로 만들어진 내 여행루트를 생각하다 보니 꾸벅꾸벅 졸음이 쏟아졌다.


다시 돌아온 프랑크푸르트는 여전히 대도시였다. 앞전 도시와 확연히 차이나는 마천루와 스카이라인이 짙은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한인 에어비엔비를 예약한 처음과 달리 이번에는 호스텔을 예약했다. 걸어가는 동안 조금씩 험악해지는 분위기가 느껴졌지만 급하게 잡은 방이 이 정도 금액이면 포기해야 하는 게 생기는 법이었다. 그래도 막상 도착한 방은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아서 견딜만했다.


체크인을 하고 나와 도시를 걸었다. 물병을 하나 쥐고 하늘을 보다 보니 꼭 첫날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흰구름으로 낙서된 하늘은 여전히 높았고 푸르렀다.

문득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어 그대로 터를 닦고 집을 잡아 쉬어보고 싶다. 그건 이곳이 천국 같아서도, 완벽해서도 아니다. 그저 더 많은 사람을 보고 더 큰 세상을 느껴보고 싶다. 공부를 하고 싶어 졌다. 내가 모르는 건 아직 너무 많고 나는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걸 겨우 알아낸 사람이었다. 지금의 감정을 정리하고 싶었고 기억하고 싶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걸 기다리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저 긴 이동에 지친 것일까.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건 내가 이 풍경을 그리워할 것이란 거다. 풍경을 두 눈에 꾹꾹 눌러 담았다. 고민도 생각도 많아지지만 대다수는 후회라기에는 너무도 경쾌한 아쉬움이다.


숙소로 돌아와 이른 잠을 청하고 늦은 아침을 맞이했다. 오늘은 뭘 할까 싶다가 그래도 유럽여행을 왔는데 소소한 기념품도 안 사가면 아쉬울 것 같아 쇼핑 아닌 쇼핑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기껏 사봐야 치약과 비타민 따위들이지만 그것도 물건이라고 바구니가 묵직했다. 패키지가 예쁘다고 집어넣은 향수는 덤이다. 뿌리지도 않을 텐데 무슨 사치인가 싶지만 이때가 아니면 향수는 영원히 안 살 거 같아서 핑계에 집어넣었다.

분명 자질구레한 것들은 넣었는데 찍혀 나온 숫자는 작지가 않다. 다들 여행 와서 기념품으로 캐리어를 꽉꽉 채워 쓸어간다는데 사람들이 내 생각보다 더 많이 소비하고 더 부자이구나 싶어졌다.


숙소에 들려 캐리어 한쪽에서 비상용을 묵혀두다 남은 컵라면을 털어먹고 빈손으로 다시 걸어 나왔다. 어딜 갈까 하다 당연하게도 이곳에도 있는 크리스마스마켓을 구경했다. 찾아간 마켓은 작고 기대보다 안 예뻤다. 아쉬운 규모에 실망하려다가 내가 직전에 보고 온 마켓이 독일에서 제일 예쁘기로 소문난 마켓이란 걸 떠올리고 재빨리 실망을 거둬들였다. 달리기 1등과 320등의 대결은 성립되지 않는 법이다.


그나마 맘에들었던 도시 장식

숙소로 돌아오니 룸메이트로 한국 남성 두 명이 들어왔다. 안 그래도 좁은 방이 더 좁게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다가 호스텔 로비에서 같이 맥주를 마시게 되었다. 같은 호스텔에서 지내는 한국인들이 더 합류해 하나의 무리가 만들어졌다. 사람 대여섯에 술이 만나니 시끌벅적함은 당연한 순리였다. 다행히 로비 곳곳에는 이런 무리가 많아 크게 눈에 띄지는 않았다.


약간은 지루하고 듣기 피곤한 얘기를 듣다가 맞은편에 벽보를 구경하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팸플릿을 꺼내고 싶은데 키가 안 닫는지 까치발로 동동거리는 게 거울을 보는 거 같았다. 자연스레 근처에 있던 의자를 끌고 여자 옆으로 다가갔다. 웃으며 의자를 건네주고 감사인사를 듣고 자리로 돌아오니 남자 하나가 입을 열었다. 맞은편 여자가 신발을 벗고 의자 위로 올라간 것에 대한 편협하고 피곤한 소리가 쏟아졌다. 말도 안 섞어본 타인에게 내뱉기는 무례한 언사였다. 이해가 되지도 않았고 이해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이상한 말을 한다는 표정과 말을 하니 남자는 민망한 듯 주제를 돌렸다.

여행은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평생 엮일 일 없는 사람과 만나게 된다. 요 몇 달간 다양한 사람들을 보다 보니 두리뭉실했던 내 사람취향이 점점 또렷해졌다. 반면교사들 덕에 얻어가는 좋은 교훈이다.


즐겁지만은 않았지만 썩 나쁘지만도 않았던 자리를 피해 방으로 올라왔다. 더 논다는 J는 놔두고 G와 함께 방문을 여니 술 좋아하는 룸메이트인 캐나다 아저씨의 자리가 비어있었다. 볼 때마다 술을 마시고 있거나 술에 취해있던 아저씨는 코골이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재빨리 씻고 아저씨가 돌아오기 전에 잠을 청했다.


눈을 뜨니 기절해 있는 옆침대 사람들이 보였다. 다들 꿈나라이길레 방심했더니 시곗바늘은 꽤 늦은 오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침 겸 점심을 먹고 그동안 부치지 못한 엽서를 정리했다. 겸사겸사 나에게 부치는 엽서까지 챙기고 길을 나섰다. 그동안 가족과 지인들에게만 보내다 처음으로 나에게 쓴 엽서를 부쳐보았다. 그냥 가방 한구석에 넣어놓고 가면 되는걸 굳이 우표를 사서 부치고 분실의 위험을 감수하며 한 달 뒤에 받아보겠다는 게 번거롭고 비효율적이지만 그 번거로움 사이에서 낭만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또 나는 나의 버킷리스트 하나를 지웠다.


한국까지 내 당충전을 맡아줄 든든한 젤리도 사고 호스텔로 돌아왔다. 마지막 날은 일찍 정리하고 사색이나 잠길까 하는데 정 반대로 시끌벅적한 밤을 보냈다.

시작은 룸메이트부터였다. 하루사이 그래도 말을 터서 익숙해진 J랑 G와 대화를 하다가 같이 주방에서 놀기 시작했다. 오가며 얼굴을 익힌 사람들이 합류하기 시작했고 각자의 룸메이트들도 모이며 무리가 조금 커지기 시작했다.

삼삼오오 모여 놀던 와중에 한 명이 호스텔에서 운영하는 '펍 투어'에 같이 갈 것을 제안했다. 나는 이미 매주 두 병을 마셨고 애초에 주방에 왔던 이유는 내가 가져와 다 먹지 못한 라면을 나눔 하기 위해 왔던 터라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러나 내가 유럽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라는 얘기를 들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를 꼬시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참여비 무료에 공짜술을 한잔씩 준다는 말에 홀랑 넘어가버렸다.

그렇게 얼렁뚱땅 앉아있다가 10분 전에 펍투어에 참여했으니 복장이 준비되었을 만무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나온 바깥은 점점 추워졌고 지나온 밤거리를 되돌아가 옷을 가지고 다시 합류하기에는 너무 무서웠다. 달달 떠는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외국인 아저씨가 내게 점퍼를 벗어주었다. 덕분에 살았다.


투어는 신기했다. 열명이 좀 넘는 사람들이 가이드를 따라 펍으로 들어갔고 술집에서는 모두에게 작은 술잔을 한잔씩 주었다. 그렇게 술을 받고 약 한 시간 정도 놀다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다른 펍으로 이동했다. 공짜술을 이렇게 주면 술집에서는 뭐가 남나 싶었는데 공짜술만 받아먹는 건 나를 포함한 두엇뿐이었고 대다수는 추가로 술을 더 시켜 마셨다. 특히나 내 룸메인 캐나다 아저씨가 큰손이었다.

두 번째로 들어간 술집에서 나는 서넛의 사람들과 함께 열심히 춤을 췄다. 노래에 맞춰 몸을 흔드는 게 재미가 없을 수 없지만 내게 옷을 빌려준 아저씨(처럼 보이는 30대 초반이었다.)가 뚝딱이는 모습을 보는 건 더 재밌었다. 정박을 엇박으로 추며 몸을 흔들던 아저씨는 그날의 스타였다. 술을 마시는 대신 춤을 추는 무리는 사람이 바뀌고 숫자가 늘었다 줄어들었다 했지만 나와 아저씨, 그리고 또 다른 언니 하나는 고정 멤버였다. 우리는 엉망인 벨리댄스와 테크노, 탭댄스를 추었고 그 펍을 나올 때에는 너무 웃어 광대가 아플 지경이었다.

재밌는 밤이었지만 나는 내일 비행기를 타야 했다. 중간에 호스텔로 돌아가겠다 말을 하고 빠져나오니 한국인 한분이 본인도 가려했다며 같이 밤거리를 걸어주셨다. 나오기 전 내일 귀국해야 하니 지금 옷을 돌려주겠다는 내 말에 아저씨는 체크아웃할 때 로비에 맡겨두라며 쿨하게 인사했다. 아까보다 더 추워진 날씨였지만 신나게 논 열기와 친절한 아저씨의 옷 덕분에 따뜻하게 호스텔로 돌아올 수 있었다.


유일하게 남은 그날의 사진. 숙소로 돌아오던 다리에서

그렇게 마지막을 불태우고 끝날 줄 알았건만, 나의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오니 비어있는 침대에 누가 누워있는 게 보였다. 그새 체크인을 했나 싶은데 조금 싸한 기분이 들었다. 담배와 대마, 술냄새가 섞인듯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별일 없길 바라며 놔두고 간 야상 지퍼를 열자 내가 항상 들고 다닌 행운의 2유로 동전이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내 여권 옆에는 G의 학생증과 카드가 들어있었다. 어떻게 봐도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우선 여권이 무사하다는 것에 감사했다. 잠깐 정신을 놓은 대가가 아찔했다.

다른 짐을 확인하고 립셉션으로 내려가 직원을 호출했다. 내가 도둑이 들었다고 하자 미안하지만 별 수없다는 반응이던 직원은 내가 범인을 알 것 같다 말해도 영 미지근해 보였다. 그 방에는 5명이 자고 있었고 나를 포함한 3명은 펍투어로 향했다. 남아있던 G는 도둑질을 할 거면 그런 멍청한 방법으로 하진 않았을 것이다. 결국 범인은 새로 들어온 사람인데 직원은 모두가 자는 시간이니 별 수없단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일단은 씻고 잠을 청했다. 모든 짐을 잠그고, 침대에 동여매고 여권과 지갑은 내 몸 바로 근처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딱 한숨을 자고 일어났다. 대충 정신을 차리고 씻고 온 G에게 다가가 학생증과 카드를 보여주었다. 깊은 한숨이 올라온듯한 G는 안 그래도 본인이 핸드폰을 침대 위층 사람들이 훔쳤다가 자신에게 걸리자 밑으로 떨어트리고 발뺌을 했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슬쩍 G의 침대위층을 바라보자 어제는 왜 몰랐나 싶게 사람 둘이 엉겨있는 모습이 보였다. 보는 순간 '잡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깨지 않게 소곤거리며 정보를 수집하고 방을 나와 립셉션으로 향했다. 직원은 바뀌어있었다.

역시나 도둑이 들었다는 말에 미안하다 말하면서도 잡기는 힘들다 말하던 직원은 내가 두 명이 한침대에 누워있다는 말을 꺼내자 태도가 달라졌다. 그리고 내가 나머지 셋 중 둘과 친구이고 다른 하나는 내 친구와 새벽 내내 펍투어를 다녔단 말에 확신을 가졌는지 바로 방으로 함께 가자고 했다. 숙박객을 턴 건 용서해도 무전취침은 용서 못하는 게 호스텔다웠다.


직원이 들이닥친 순간에도 도둑들은 태평히 잠을 자고 있었다. 직원의 호출에 일어난 그들은 커플처럼 보였다. G는 직원을 데려온 나를 보더니 신나서 자기가 당한 일을 나를 통해 직원에게 일러 받쳤고 직원은 엄숙한 재판장이라도 된 것처럼 그 둘에게 퇴거를 통보했다. 아마 그들은 나름 머리 쓴다고 G의 물건을 내 자리에 놓아 논 것 같은데 어림도 없다. 적어도 국적은 확인하고 공사를 쳤어야지.

내 행운의 2유로는 털렸지만 다행히 여권은 무사했고 다른 룸메이트들도 사라진 물건이 없었다. 아마 J와 캐나다 아저씨는 지갑을 들고 투어에 나갔고 G의 폰은 털려다 실패했으며 나 역시 야상에 있던 여권과 동전 말고는 귀중품이 죄다 캐리어 안에 있어 손을 못 댄 듯싶었다. 운이 좋은 편이었다.


모든 게 정리되고 어제 빌린 옷을 맡기러 내려온 나에게 직원은 사과와 함께 마시고 싶은 음료를 물어보았다. 콜라를 원했지만 잠을 덜 자 정직하게 나온 '콜라'라는 단어에 진짜 Cola라고 적힌 술을 받게 되었다.(순간 Coke라고 발음해야 하는 걸 망각했다.) 정정하는 게 귀찮아 그냥 아침부터 술을 비워 넣었다. 도수가 맥주보다도 낮았기에 가능한 행위였다. 음료를 받고 옷을 맡기려는데 우연하게 아저씨가 로비로 들어왔다. 절묘한 타이밍에 감사인사와 옷을 건네주었다.


여러모로 다이내믹한 마지막날이었다. 그리고 운이 좋은 하루였다. 내 사라진 행운의 2유로는 내 여권을 지켜주었고 낮술도 아닌 아침술을 주었으며 내가 무사히 감사인사를 전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정도면 2유로 이상의 가치를 내게 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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