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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유럽일기 닫는 글

나는 나의 시간을 살아갈 것이다

by 강단화

2025. 08. 18.


처음 <열여덟 유럽일기>를 브런치에 올린 게 24년 8월 24일이다. 이 이야기를 다 옮기는데 무려 1년 가까이 걸렸다. 글을 올리기 전 비축분을 만든다고(그렇다 놀랍게도 이 글의 초기에는 비축분이란 게 존재했다!) 동당거렸던걸 생각하면 1년이 넘는 글이었다. 연재를 시작할 때의 예상보다는 좀 더 길어졌고 글을 쓰고 있는 장소도, 상황도 많이 달라졌다. 그 기간 동안 꾸준히 내 글을 읽으러 찾아와 주신 분들이 계시다는 게 놀랍고 감사할 뿐이다. 혼자서 정리하고 싶어 시작한 글인데 하나둘 읽어주시는 분들이 생기면서 예상치 못한 기쁨도 배웠다.


이제껏 글을 따라와 주신 분이라면 알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잡생각이 많고, 수다스러우며 게으름 피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무려 1년이 걸렸지만 하나의 이야기를 완결한 스스로가 신기하고 대견하다. 내 열여덟의 유럽여행 여행기는 마무리되었지만 나는 그 뒤로도 쭈욱 살아가고 있다. 여행을 다니고 일을 하며 평범하다면 평범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은 낭랑 18세의 여행기가 아닌 피곤한 27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평소보다 한층 더 지루한 이야기가 될 거라 자신한다.


처음 여행기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자연스럽게 내가 겪은 일을 정리하고 싶었고 가능하다면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을 뿐이었다. 작은 소망이 있다면 실제로 인쇄해서 나만의 책을 만들면 좋겠다는 정도였다. 여행을 하는 도중, 그리고 마치고 난 얼마간에서도 나는 내가 금방 글을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생활과 삶에 밀리고 밀린 계획은 내 게으름까지 만나니 어느새 몇 년이 훌쩍 지나있었다.


그 사이 나는 열심히 일했고, 삶을 살아냈으며 몇 번의 여행을 더 떠났다. 작은 배움과 경험이 쌓이고 조금 더 자랐다고 생각할 때쯤 이번에는 동생과 같이 여행을 떠났다. 즐거웠다. 그리고 내가 언젠간 다시 오고 싶다 생각한 그 장소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은 굉장히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렇게 이번에야말로 내 감정과 경험을 정리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땐 그랬었다.


그러나 그렇게 돌아온 한국에서 지독한 우울이 나를 찾아왔다. 짧은 시간 동안 큰 이별들을 겪고 내가 사실은 자라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게 몰아치는 감정들을 돌보고 보살필 여유가 당시에는 없었다. 그때쯤 다시 글을 써보는 게 좋다는 추천을 받았다. 쉽지는 않았다. 그 지난한 시간 동안 이곳에 두어 개의 글을 적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열여덟 유럽일기>의 베를린 편 초고였다. 다시 읽어보면 엉망인 일기장을 두서없이 늘어놓은 글이었다. 그러나 그 엉망인 글에서 딱 한 문장. "이 석양을 보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 문장을 쓰고 나는 펑펑 울었다. 그리고 글을 멈추었다. 19년도에 만들어진 초고는 그렇게 내 노트북 속에 잠들었고 나는 긴긴 우울을 견뎌내며 많은 것들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24년이 되었다. 그사이 나는 서울에서 동생과 함께 자취를 시작했고 어설프게나마 취직이란 걸 해 안정된 사이클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사이클은 금방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사이클 자체가 문제였는지 장소가 문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출근길에 건널목을 건너는 도중 여기서 차에 치여 '합법적'으로 일을 그만둘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순간,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행히 내가 정상이 아니란 판단은 내릴 수 있는 정신이었다.

우스갯소리로 친구에게 회사를 부숴버리고 싶은 건 정상이고 나를 부숴버리고 싶은 건 병원을 가야 하는 거라고 말하곤 했는데 당시의 내가 바로 그 "병원을 가야 하는 상태"였다. 진단이 되었으니 이젠 처방을 할 차례였다.


첫 처방은 내가 그렇게까지 나쁜 상태가 아니라 자각하는 거였다. 내 동생은 (그 녀석에게는 불운하게도) 내게 좋은 테라피스트였으며 나는 한동안 쉬어도 될 만큼 모아둔 돈이 있었고 여차하면 돌아갈 집도 있었다. 조금의 여유를 상기하고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걸 시도해 봤다. 그중 하나가 글이었다. 내가 왜 다치면 안 되는지, 내가 왜 돈을 벌고 싶은지, 내가 하고 싶은 게 뭐였는지 떠올리고 싶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덮어둔 일기장을 꺼내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쉽지는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 글쓰기 실력은 상향은커녕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고 기억 역시 흐릿해졌다. 그러나 한 문장 한 문장이 계속 쌓여갈수록 기억과 감정도 떠올랐다. 쉽진 않았지만 즐거웠다. 때론 피곤하고 어려웠으나 뿌듯했다. 그게 나를 계속 쓰게 만들었다. 그렇게 <열여덟 유럽일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오늘 마무리되었다.


나의 첫 유럽여행은 자유로웠지만 불안했고 미숙했으며 즐거웠다. 돌아온 한국은 익숙했지만 답답했고 편안했지만 괴로웠다. 그 어느 곳도 완벽하지 않았지만 그 두 곳을 모두 경험했다는 게 소중했다. 그리고 그 소중한 경험을 늦게나마 기록하고 공유했다는 게 또 다른 소중함 경험이 되었다.

이 느리고 지루한 여정을 함께 해준 독자님들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언제나 내 글에서 오타와 비문을 찾아내는 내 가장 열렬한 독자인 엄마에게 감사를 보낸다. 만약 엄마가 없었다면 난 이 글을 마칠 수 없었을 거다. 엄마가 읽기 전 재빨리 오타와 비문을 검수해 준 동생에게도 감사를 보낸다.


글을 연재하는 1년 사이 나는 일을 그만두었고 알바를 시작했으며 모아둔 돈을 가지고 훌쩍 떠났다. 그리고 도착한 곳에서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근 몇 달간 한 주 동안 일에 치여 살다가 매주 휴일과 월요일 부리나케 글을 쓰고 올렸다. 아마 한동안은 내가 월요일에 아무런 글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게 어색할듯하다. 그렇기에 조금 쉬었다가 나는 내 또 다른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글을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 글을 올리고 아쉬웠던 부분들을 야금야금 수정하겠단 야심 찬 계획도 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 그동안의 관심에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혹시나 나중에 나의 글을 다시 발견하신다면 또다시 당신의 시간을 내게 허비해 줄 것을 청한다.


열여덟의 이야기를 마치며. 강단화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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