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까지 72시간
2016.12.02 -03
Frankfurt am Main, Deutschland
짐을 정리하는데 요란한 공사소리가 들렸다. 내부공사인지 방을 울리는 소리가 어마무시했다. 이 와중에서도 잘 자는 술꾼아저씨가 경이로울 정도였다. 화장실을 가니 청소를 하던 하우스키핑언니가 귀마개를 내밀었다. 조용히 내밀어진 주황색 귀마개가 너무 고마워 절로 웃음이 났다. 땡큐라 외치는 내 목소리는 소리에 묻혔어도 웃고 있는 서로의 얼굴은 또렷이 보였다.
방으로 돌아오니 어젯밤을 같이 불태운 J와 술꾼아저씨는 그새 절친이 되어있었다. 서로 말도 잘 안 통하지만 술에 대한 정열은 통했는지 아저씨는 연신 떠나는 J를 아쉬워했고 나까지 덤으로 기념품까지 챙겨주었다. 작은 made in Canada 메이플 시럽을 가방에 챙겨놓고 부지런히 짐을 정리했다. 캐리어를 싸는 게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묘했다. 테트리스처럼 짐을 끼워 맞추고 항공법에 맞추어 배낭과 캐리어에 나눠놨다. 올 때보다 캐리어가 커졌는데 공간에라 짐도 늘어나 결국 더 무거워진 짐을 가지고 돌아가게 되었다.
체크아웃을 하고 공항으로 가는 기차를 올라탔다. 첫날 이곳으로 올 때는 달달 떨며 인터넷도 안 되는 핸드폰을 부여잡고 떨었지만 오늘은 능숙하게 표를 끊고 인터넷으로 기차 시간을 확인했다. 세상사 그렇겠지만 경험과 장비만 있다면 뭐든지 일은 쉬워진다.
그렇게 어느 정도 능숙하게 체크인을 하고 오늘 새벽에 액땜도 했겠다 이 정도면 꽤 괜찮은 마무리라 느꼈을 때 복병이 찾아왔다.
사람들이 몰리기 전에 미리 게이트에 가서 자리 잡고 쉴까 싶어 조금 이르게 보안검색대를 찾아갔다. 어느 공항이 그렇듯 친절을 기대하지는 않는 구간이었다. 그러나 그게 무례를 이해한단 의미는 아니었다.
나의 비행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출발해 베트남 하노이를 경유하고 서울로 가는 계획이었다. 저가 노선이 그렇듯 구석의 게이트가 배정되었고 그 게이트에서 가까운 보안검색을 지나는 승객들의 대부분은 아시아인들이었다. 한 무리의 베트남인들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을 때였다. 전신 스캐너 앞에서 한 명의 승객이 직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버벅거리면서 일이 시작되었다. 가만히 서서 정해진 포즈를 취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직원의 말은 너무 빠르고 불친절했고 나이 든 승객은 영어를 할 줄 몰라보였다. 몇 번을 그 승객에게 말을 걸던 직원은 주변을 살펴보다 나에게 갑자기 눈짓하기 시작했다. 뭘 어쩌란 거지 싶었다. 난 베트남어를 할 줄 몰랐고 솔직히 그 승객이 베트남인이 맞는지도 확신이 안 들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니 직원은 대놓고 한숨을 쉬고는 이번에는 아예 독일어로 말하며 승객의 몸을 잡아끌었다. 보다 못한 내 뒤에 있던 또 다른 사람이 직원의 말을 서툴게 통역한 뒤에야 그 승객은 보안검색을 마칠 수 있었다.
이미 거기서부터 기분이 영 좋지 않았는데 내 차례가 되어서 또 그 직원이 문제였다. 내가 센서를 지나고 나서 내게 바지 주머니를 벌려보려고 했는데 내가 주머니를 보여주었음에도 계속 바지를 열라면서 '팬츠'와 '오픈'을 번갈아가며 외쳤다. 주머니를 보여주었음에도 계속 그러기에 내가 벨트를 잘못 알아듣고 있나 싶어 벨트를 가리키니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인지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벨트가 문제인듯싶어 벨트를 풀려하니 이번엔 기겁을 하며 나에게 '포켓'을 외치며 내 바지 주머니를 잡아당겼다. 당시 내가 입은 바지는 스키니진이었고 주머니는 실용성이 거의 없어 무언가 들어있다면 바로 윤곽이 보일 정도였다. 더군다나 아까 분명히 열어서 보여줬는데 계속 딴말을 하다가 내 바지를 잡아당기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고서 동료에서 독일어로 나에 대해 불평하는 게 느껴졌다. 억울해서 네가 벨트라 말했고 주머니는 아까 보여줬다고 얘기해 보았지만 거의 날파리 무시하듯 나 무시하는 모습에 어이가 없어졌다.
마지막날이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떠나는 아쉬움을 후련함으로 바꿔주고 싶었던 독일의 배려라 생각하기로 했지만 그래도 화가 나는 건 여전했다. 좀 더 영어를 잘했다면 상황이 달랐을까, 아니면 좀 더 뻔뻔하고 깡이 좋았으면 사과를 받을 수 있었을까. 스스로를 탓하게 되는 게 제일 짜증 났다. 명백한 무례는 타인이 저질렀는데 내 부족함을 탓하는 게 너무도 속상했다.
역시나 아무리 좋아도 타국은 타국이었고 나는 그 직원 덕에 타향살이의 명암을 다 볼 수 있었던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물론 그래도 여전히 짜증 났지만.
비행기에 앉아 첫 번째 기내식을 잘 받아먹고 영화 3편을 내리 보았다. 피곤했지만 잠을 자지는 못했고 그 때문인지 신경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기내를 채운 답답한 공기와 향수 냄새가 내 신경을 더 곤두서게 만든 건 당연했다. 와중에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여행을 가는 것처럼 보이는 노부부였는데 나에게 말을 붙여보려는 시도는 좋았으나 주제 선정이 엉망이었다. 그들을 비난하고 싶진 않지만 당연스럽게 내가 베트남 사람이라 생각하고 말하는 그 무해하고 무례한 인종차별에 간신이 잡아둔 신경줄이 뚝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베트남을 가는 비행기니 이곳에 있는 모든 아시안인이 베트남 사람 같은 것일까? 그리고 베트남인이 아니라는 답변에 왜 바로 일본인이 나오는 것일까. 짧디 짧은 대화에서도 느껴지는 그들의 무지가 나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잠이라도 자자 싶어 억지로 눈을 붙였더니 밥시간을 놓쳤다. 배가 고프긴 했지만 옆자리 할머니가 드시는 기내식 냄새를 맡으니 오히려 속이 뒤집힐 거 같았다. 착륙 때까지 잠을 자는 건지 마는 건지 비몽사몽 눈만 감고 있었다.
하노이에서의 환승은 호찌민에서의 환승보단 조금 더 수월했다. 경유 대기시간이 꽤 길었기에 공항 의자에 앉아 간신히 연결된 와이파이를 누렸다.
마지막날 새벽부터 이뤄진 다양한 상황들과 부실한 식사, 좋지 않은 수면의 질로 예민해진 신경줄은 결국 엄마와의 대화에서 폭발했다. 분명 나중에 후회할 메시지를 보내면서도 이것도 보내지 않으면 공항구석에서 울어버릴 거 같아 그냥 와다다다 쏟아내었다. 엄마의 잘못도 아닌데 그냥 내가 너무 지치고 힘들었다. 즐거운 여행을 보내고 집으로 들어가는 길인데 즐겁지도, 기대되지도 않았다. 그냥 너무 피로할 뿐이었다.
한국인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고 비행기 올라타 사방에서 한국어가 들리기 시작하자 나의 기분은 더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독일에서의 마지막 기억이 썩 좋지 않았음에도 다시 독일로 돌아가고 싶어 졌다. 그 감정은 내 앞에 앉은 젊은 남자 세 명이 자신들의 범죄 얘기를 자랑할수록 더 강해졌다. 저들이 얼마나 좋은 여자를 '구매'했는지 어떻게 하면 '무료'로 그들과 관계할 수 있는지를 공유하는 목소리가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이어졌다. 그 개소리를 듣는 순간 앞으로의 비행에서 내 최대의 목표는 앞 좌석을 무시하며 구역감을 참는 것이 되었다. 다행히 그들은 비행이 시작되고 입을 여물었다.
좁고 불편한 좌석에 앉아 향수를 먹는 건지 밥을 먹는 것인지 모를 식사를 마치고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는 않았지만 잠을 자고 싶었다. 귀국길이 왜 이리 불편하고 괴로운지 모르겠다. 인천공항에 도착하고 짐을 찾는 순간부터 나의 피로는 더 짙어졌다. 입국하자마자 보인 전광판에서는 어린 여자 연예인이 낯 뜨거운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그 광고를 보는 순간 난 내가 지난 3개월간 '부적절한 광고'를 보지 않고 살았다는 것을 자각했다.
나는 음료광고에 왜 교복을 입고 나온 여성이 옴몸을 배배 꼬고 있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입국 순간부터 보이는 속바지보다 짧은 바지를 입고 가슴을 내밀고 있는 어린 여자의 모습을 보는 게 답답했다. 그 광고판을 보는 순간 '한국'에 왔다는 게 실감됨과 동시에 이딴 걸 보고 한국에 왔단 걸 자각했다는 게 싫어졌다.
따뜻한 귀국길과 유종의 미. 그리웠던 가족과 입맛에 맞는 식사.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이해되는 언어와 익숙한 문화들. 익숙하기에 편안한 귀국길을 기대했것만 그중 하나도 맞는 게 없었다. 섬이 고향인지라 서울에 도착했어도 집까지는 아직 한참이었고 홀로 내린 인천공항에서 마주한건 익숙해서 더 짜증 나는 것들이었다. 얼마든지 좋게 넘어갈 수 있지만 긴 여행에 피로한 몸은 작은 것 하나에도 파드득 성질을 내기 시작했고 지친 심신은 가야 할 길을 여행의 마지막이 아닌 집으로 가는 고난의 시작으로 인식했다.
실제로 마주한 여행의 마지막은 이상적인 여행의 마지막과는 거리가 꽤 멀었다.
그럼에도, 다시 떠나고 싶었다.
이제껏 제 열여덟 유럽일기를 따라와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다음 주는 글의 마무리이자 열여덟이 아닌 스물일곱의 일기가 올라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