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 투 크리스마스
2016.11.25 - 26
Nürnberg, Deutschland
답답할 정도로 따뜻하게 머물렀던 호스텔을 떠나 다시 길을 나섰다. 이번 목적지는 다시 뉘른베르크다. 들렸던 곳을 다시 되돌아가는 것도 모자라 결국 다시 돌아가야 하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더 멀어지는 루트였다. '합리적 사고'를 거친다면 슈투트가르트에서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게 더 저렴하고 가까웠다. 그러나 아직 나에게는 독일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일주일이나 남아있었고 그 기간을 프랑크푸르트에서 보내기는 조금 많이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애초에 '합리적 사고'를 거쳐 계획된 여행도 아니었다. 여행초반에 하나를 놓칠 때마다 다시 돌아올 수 있을 테니 무리하지 말자 스스로를 달랬지만 그 말이 갈 수 있는데 가지 않겠다는 말과 동일한 뜻은 아니었다. 여기까지 왔고 내겐 아직 여행자금도, 시간도 남았다. 그럼 다른 곳으로 못갈이유가 없었다.
여유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넘치는 건 아니라서 저렴한 버스표를 구매했다. 이제는 완연한 겨울날씨에 야상을 입고도 달달 떨면서 정류장에 서있었다. 오라는 버스는 안 오고 문득 내가 버스를 놓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제껏 버스를 놓쳤을 거라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예정된 시간에서 한참을 지나도 차가 안 오니 절로 불안함에 발이 동당거렸다. 불안함도 달랠 겸 핑계에 엄마와 짧은 통화를 했다. 이번 호스텔에서 머무는 동안은 약한 와이파이에 통화를 별로 하지 못했었다. 이참에 목소리도 듣고 위로도 받으니 마음이 조금 놓였다. 전화를 끊고 다시 추위에 입김을 내뱉었을 때 근처에 서있던 동양인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혹시나 방해가 된 걸까 싶어 어색히 고개를 끄덕이니 여자가 슬쩍 나에게 다가와 한국인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 대답하니 여자는 그럴 줄 알았다며 시원하게 웃었다. 처음에는 확신할 수 없었는데 내가 통화를 하는 소리를 듣고 한국인인걸 알았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조금 놀라웠다. 처음 정류장에서 나를 제외한 유일한 동양인 여자를 보고 혹시나 한국인인가 싶어 엄마와의 통화도 조용히 했던 터라 그 작은 소리로 한국어를 알아들었다는 게 조금 놀라웠다.
그렇게 J와의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J는 대학생이었는데 (내 짧은 영어실력에 의하면) 독일 영주권이 있는 중국인이었다. 우리는 기나긴 기다림에 지루했고 수다는 좋은 심심풀이였으며 J는 한국에 관심이 많았다. 늦은 버스 덕분에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다. 우리는 버스를 기다리는 내내, 그리고 버스가 뉘른베르크에 도착할 때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수다를 떨었다. 조용조용 얘기하는 목소리는 작았지만 즐거움을 숨기지는 못했다.
J는 정말 다양하게 한국에 관심이 많았는데 패션부터 드라마, 정치와 경제까지 다 관심 있어했다. 물론 그중 제일은 드라마였다. 나는 주로 J가 말하는 드라마를 듣고 그 드라마가 얼마나 현실성이 있는지를 말해주었는데 J는 드라마의 현실성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그냥 팩트체크를 하는 그 행위자체를 즐거워했다.
너무 신나게 수다를 떤 터라 우리는 휴게소에서 거의 버스를 놓칠뻔했다. 뒤에 낙오된 프랑스 승객 하나까지 내가 끌고 들어간 것으로 버스의 문이 닫혔다. 정신 단디 차려야지 하면서도 J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절로 긴장이 풀리고 대화에 집중하게 되었다.
짧게 느껴지는 긴 여정 끝에 뉘른베르크에 도착하고 나서 J와 나는 바로 다시 약속을 잡았다. 각자의 숙소로 돌아가 체크인을 하고 짐을 정리한 뒤 우리는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약 2시간 뒤 나는 반짝이는 크리스마스트리 근처에서 J를 다시 만났다. 우리는 마켓을 구경하며 늦은 저녁과 군것질거리를 해결했고 한시도 쉬지 않고 입을 움직였다. J는 소시지가 가득한 접시하나를 앞에 두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고 나는 누텔라가 가득 발린 크레페를 손에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 둘의 손에는 따뜻한 와인이 한잔씩 쥐여있었다.
그전 도시들에서 그저 마셔보고 싶다 생각만 한 따뜻한 와인을 손에 쥐고 크리스마스마켓을 누볐다. 원한다면 컵 보증금을 내고 마신 컵을 기념품으로 가져갈 수도 있다 했지만 은근히 무겁고 깨질 것 같아 얌전히 반납하고 보증금을 받았다. 작은 와인 한잔은 겨울밤 내내 나의 단짝이 되어주었고 안주는 J와의 끝없는 수다였다.
한동안 크리스마스 마켓을 많이 본 것 같았는데 뉘른베르크에서 보는 마켓은 조금 더 특별했다. 처음에는 원래도 마켓으로 유명한 동내라서 그런가 싶었지만 나중에서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번 마켓에서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저 눈으로 보고 지나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 북적이는 마켓 한가운데에서 의자도 없는 테이블에 몸을 기대고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술술 나오는 수다를 즐기며 한참을 깔깔거렸다. 같은 테이블에 기대 있는 아저씨들의 소음이 불쾌하지 않았고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배경음악 같았다. 크리스마스를 구경하는 게 아니라 내가 크리스마스의 일부가 된 기분이었다. 굉장히 즐거웠고 동시에 아쉬웠다.
J와 헤어지고 크리스마스 풍경이 가득한 길을 걸으며 왜 유럽인들이 한 달은 먼저 크리스마스를 즐기는지 알 것도 같았다. 이 반짝이는 겨울밤을 딱 하루만 즐기란 건 고문이나 다름이 없다. 한 달은 넉넉하게 다양한 사람들과 이 시간을 즐기다 마지막날 가족과 함께 맛있는 저녁을 먹는다면 그게 아마 가장 '크리스마스'를 잘 보냈다 말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어제의 하루가 길었던지라 나의 아침잠도 길어졌다. 한 시간 넘게 버스를 기다렸던 터라 한기가 약간 들었었는데 저녁에 또 야외를 실컷 돌아다녔으니 컨디션 회복이 필요했다. 물론 어젯밤 와인을 파시던 인상 좋은 가게주인은 와인 한잔이면 감기도 사라진다 했지만 나의 감기기운을 다 막기에 와인 한잔은 조금 아쉬웠다. 호스텔 침대에 누워 밀린 감기기운을 해독하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마치니 벌써 오전이 다 사라진 시간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거의 동네마트처럼 익숙해진 마트로 들어가 간단한 요깃거리를 샀다. 대충 점심을 때우는 동안에도 마음 한구석에 어제의 기분 좋은 잔열이 남아있었다. 오늘도 어제의 기분을 이어나가고 싶어졌다. 혼자보다는 여럿이 좋을 거 같아 아주 오랜만에 인터넷 카페 동행글을 열어보았다. 얼마 안 가 지역이 겹치는 글을 발견하고 연락을 보냈다. 답장이 몇 번 오고 가고 약간은 느낌이 이상했지만 그래도 혼자 보내는 것보다는 나을듯해 저녁약속을 잡았다.
내일 계획을 짜고 밀린 연락들도 해치우다 보니 새로운 룸메이트가 도착했다. 베트남사람이라는 룸메는 말투부터 친절함이 넘쳐흘렀다. 30여분 정도 수다를 떨고 노는데 그쪽에서 먼저 같이 마켓구경을 가자는 말을 꺼내었다. 미리 일행을 구해놓은지라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고 거절했다. 차라리 이 친구랑 놀러 나갈걸. 후회는 늦어서 후회인 것이다.
새로 만난 한국분 둘은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다. 다만 나와 결이 맞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두 분 다 모난 곳은 없었지만 너무나 텐션이 높은 탓에 나는 사람이 아닌 비글 두 마리와 산책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비글은 내가 목줄이라도 잡을 수 있지만 이 둘은 나보다 나이 많은 인간이었다. 당연히 목줄 따위는 없었다. 나에겐 다행스럽게도 둘이 상성이 맞은듯해 나는 그들의 수다 사이에서 웃고 있는 것만으로도 묻어갈 수 있었다. 마켓이 의외로 심심하다는 두 사람의 의견에 따라 우리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간단한 안줏거리와 각자 마실 술을 사서 일행 중 한 분의 방으로 향했다. 에어비엔비에서 독방을 빌렸다던 그분 덕에 우리는 유럽에서 보기 드물게 편안한 술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이것저것 수다를 떨다 10시쯤 자리를 정리하고 방을 나왔다. 호스텔이 근처인덕에 밤거리도 별로 무섭지 않았다.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자꾸 J와 룸메인 베트남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눈앞에 쿠키가 있어서 쥐어먹었을 뿐인데 바로 뒤에 더 큰 쿠키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이미 먹은 쿠키도 나쁘지 않았지만 저 뒤의 쿠키가 더 크고 맛있어 보였다. 이미 배는 불러 더 먹지도 못하고 그저 섣부른 선택을 아쉬워한다. 여우의 신포도라 하기에는 달려있는 포도가 너무 탐스러워 포기도 힘들다.
결국 사람은 모든 걸 가질 수 없고 특히나 경험을 할 때 생기는 무형의 기회비용은 크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절로 드는 다른 선택에 대한 아쉬움은 어쩔 수가 없다. 마음에 욕심이 그득그득한 거 보니 어른이 되려면 아직도 멀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