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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유럽일기 059

어떠한 부서짐은 더 나은 내일을 위함이니

by 강단화

2016.11.24

Heidelberg, Deutschland


오늘도 역시나 게으름을 잔뜩 피우다가 길을 나섰다. 빈약한 변명을 꺼내보자면 방에 햇빛이 전혀 들지 않아 아침이 와도 아침인 줄 모르고 계속 잠을 자게 된다. 그동안 얼굴을 못 보았던 룸메이트 한 명이 이곳의 직원이었는지 새벽쯤 퇴근해 잠만 쭈욱 자고 일어나 다시 근무를 시작한다. 피로해 보이는 모습에 인사 말고 길게 말을 붙이기가 미안할 정도였다. 그런고로 나도 따라 늦잠을 잤노라 변명하며 오늘 하루를 어찌 보낼지 고민하다가 근교 도시를 다녀오기로 맘먹었다. 사실 그전부터 가볼까 하던 도시였는데 이제껏 시간이 어중간해 방문치 못했던 동네였다.

아점으로 대충 빵 쪼가리를 챙기고 떠난 곳은 우리나라에는 오래된 성과 철학의 도시로 유명한 '하이델베르크'다.

여기 와서 단 한 번도 검사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양심에 따라 꼬박꼬박 사고 있는 티켓을 손에 쥐고 기차를 탔다. 타는 그 순간까지도 갈까 말까 고민을 하게 되는 게 내가 많이 지쳐있나 싶은 기분이 들었다. 새로운 걸 보러 가는데 기대감보다는 부채감에 움직이다는 게 스스로 찔렸다.

이제 열흘정도 남은 여행이니 일부러 더 움직여도 모자라다는 마음이 '이쯤 돌아다녔으면 좀 쉬어도 되지 않나 싶은 마음을 채찍질했다. 무엇을 하든 체력이 중요하다고 귀에 인이 박히게 얘기하던 어른들 말씀이 틀릴 게 없다. 체력이 떨어지니 도전에 대한 감각과 자극에 둔해지고 새로운 걸 보고 경험하고 싶다는 호전성은 계획했으니 따른다는 의무감과 부채감으로 바뀌게 된다. 아마 더 무너진다면 고루한 자기변명과 함께 안주를 택할 것이 눈에 훤했다.


그래서 더 이곳을 가야 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고성도, 강변도 멋있겠지만 내가 원한 건 '철학자의 길'이었다. 가방끈 짧은 나도 아는 독일의 철학자들이 사색을 하며 걸었다는 산책길은 딱히 엄청난 볼거리가 있는 곳은 아니었지만 생각하며 산책하기에는 꽤 좋아 보이는 산책로였다. 내가 독일을 떠올렸을 때 반드시 같이 딸려오는 '철학'이라는 단어를 느끼기에는 굉장히 좋은 기회처럼 느껴졌다. 항상 생각이 너무 많아 잠을 설치고 스스로를 괴롭게 만드는 나에게는 딱인 장소 같았다.


이제는 익숙해진 기차 연착을 견디고 달려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도시의 트레이드마크인 하이델베르크 성을 보자 싶어 그곳으로 향했다. 언덕에 위에 위치한 성은 목을 꺾고 봐야 할 정도로 높았고 순간 저길 어찌 가나 싶어 졌지만 진보한 과학기술은 내게 푸니쿨라를 제공해 주었다. 기울어진 산악열차는 소정의 교통비를 받고 나를 언덕 위로 데려다주었다. 처음 성을 제대로 보고 든 생각은 '판타지'같다는 생각이었다. 유럽을 여행하며 동화와 소설에 나올 것만 같은 장소들을 많이 구경했지만 이곳이 제일 '판타지'스러웠다.

뛰어나게 아름답거나 화려하다는 뜻이 아니었다. 성은 17세기 독일의 종교 전쟁 이후 반파되었고 그 후에도 자연재해와 역사의 격동을 겪으며 조금씩 마모되고 부서져내려 반쯤 폐허에 가까워졌다. 복구와 복원대신 유지보수를 택한 고성은 이제껏 내가 봐온 그 어떤 궁전과 건물보다 독특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다 부서져 내린 붉은 아치가 읽지도 않은 소설 속 장면을 그리게 만들었고 허물어진 벽면을 지나 맞이한 성곽에서 보는 풍경은 아름다웠다.

기대치 않은 만족스러움에 늦게라도 나온 것이 너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속살을 들어낸 붉은 건물이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다 부서진 폐허가 왜 이렇게 우아해 보이는지 모를 일이다. 붉은 지붕이 잔뜩 깔린 도심 위로 붉은 벽면이 무너져 내린 오래된 성이 보였다. 옛날이야기 같기도 하고 거울 같기도 한 풍경이다.


건물을 구경했다가 풍경을 구경하다 요리조리 고개를 돌리다 묘하게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열심히 한국어로 건물을 설명하는 가이드님을 보자 절로 반가운 탄성이 튀어나왔다. 잠깐 쉬는 시간이 온듯해 조심스레 인사를 건넸다. 놀랍게도 그분은 여행초반 프랑크푸르트 시티투어를 진행해 주신 가이드님이셨다. 이곳이 프랑크푸르트에서도 멀지 않은 곳이라 데이투어를 나오셨다고 했다. 놀랍게도 나를 기억해 주고 반갑게 인사를 돌려주셨다. 투어 이후에 쾰른의 숙소에서 심적으로 도움 받은 것도 있어 괜스레 목소리가 올라갔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의외의 인물을 만나니 오늘의 외출이 더 즐거워졌다. 잠깐 인사를 나누는 사이에도 가이드님은 성의 관람포인트 몇 개와 시티야경까지 알차게 추천해 주셨다. 몇 번이고 반갑다 말을 전하고 가이드님이 알려준 내부관광 스폿으로 발을 옮겼다.


부서진 벽이 우아할수도있구나

다 부서진듯한 성이지만 놀랍게도 실내 박물관이 존재했다. 박물관은 당시 성에 관한 내용도, 화려한 보물에 관한 것도 아닌 '약국'에 관한 박물관이었다. 오래된 약병과 약재함, 약재 도구 따위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우중충한 날씨와 맞물려 완벽한 미스터리소설 속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예전부터 그런 분위기를 좋아했던 터라 꽤나 괜찮은 관람이었다. 빗물냄새가 석재를 타고 흘렀고 비슷하거나 똑같은 약병과 약제함의 나열은 묘한 심신의 안정마저 가져다주었다.

작은 박물관을 보고 나와 가이드님이 꼭 보고 가라 말한 거대한 와인통을 보러 이동했다. 지하에 놓인 거대한 오크통은 과거 영주가 세금으로 징수했던 와인을 보관하던 창고라고 한다. 성인 남자 셋을 새워둔 거 같은 같은 거대한 높이의 오크통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뒤로 길게 뻗은 몸체를 따라 무려 관람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실질적으로 저런 곳에 와인을 보관했다면 관리가 안되어 아까운 술이 다 망가질 것 같은 사이즈였다.

좋은 구경을 마치고 성을 나왔다. 다시금 푸니쿨라를 타고 내려가 이번에는 다리를 건너 맞은편 철학자의 길로 올라섰다. 기차시간이 되기 전에 철학자의 길을 보고 추천받은 하이델베르크 시내까지 들려보자 하니 시간이 부족했다. 바쁘게 다리를 건너다 잠시 멈춰 섰다. 시간은 없지만 지금 보고 있는 풍경이 마음에 들어 잠시 눈에 담아두고 싶었다.

짧게나마 여유를 찾는데 근처를 지나가던 남자 두엇이 내 얼굴을 보며 기분 나쁘게 웃기 시작했다. 딱 봐도 시비를 걸든 개소리를 하든 둘 중 하나일 거 같기에 휴대폰을 단단히 손에 쥐고 파워워킹으로 다리를 걷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내 뒤에서 '니하오'와 '미야오'를 연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쓰고 있던 모자에 '미야오'라고 적여있었는데 지들 딴에는 그게 엄청난 라임이라 생각했는지 연신 미야오와 니하오를 번갈아가며 외쳐 됐다. 덜떨어져 보였다.

짜증 나지만 엮이면 피곤한 건 나기에 그냥 무시로 일관했다. 낄낄거리던 남자들은 내 맞은편에 사람이 나타나자 입을 닥치고 자리를 옮겼다. 더 덜떨어져 보였다.


나름 고대하던 장소 것만 처음 보고 온 성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인지 오늘 길에 기분이 나빠졌는지 철학자의 길은 임팩트가 미미했다. 애초에 산책길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진짜 예쁜 동네 산책길이라 조금 기운이 빠졌다. 그래도 길가에 걸터 않아 강변을 내려보니 왜 독일이 철학이 발전했는지 알 수밖에 없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우중충한 하늘에 습기와 추위가 몸을 덮쳤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안개에 채도를 빼앗긴 듯 흐릿했다. 절로 사람이 가라앉는 환경이었다. 화창한 날의 산책길이라면 모를까 겨울날 오후의 산책길은 철학이든 범죄문학이든 둘 중하나는 무조건 유명해야 하는 곳이었다.

그것도 언덕이라고 조금 춥게 느껴지는 기온에 앉았던 자리를 털어 일어났다. 시간도 체력도 산책길을 다 걸을 정도는 아니라 초입만 보고 길을 빠져나왔다. 그럼에도 온 보람은 있었다 생각됐다.


반짝이던 역사 앞

성이 있던 동네를 다시 한번 설렁설렁 돌아보고 슈투트가르트로 돌아가기 위해 중앙역으로 향했다. 가이드님께 해가 지고 보는 하이델베르크의 크리스마스 마켓이 멋있단 소릴 들었지만 그것까지 보고 가기에는 기차시간이 안될듯해 과감히 포기했다. 마켓에서 파는 뱅쇼가 그렇게 맛있다는데. 기회가 있다면 꼭 마시겠다 다짐하며 뒤를 돌았다.


플랫폼 의자에 앉아 내가 타야 할 기차를 기다렸다. 중간에 도착한 기차에서 사람들이 쏟아지고 또 가득 차 있던 플랫폼이 비워질 만큼 사람들이 올라탔다. 나만 놓고 다 떠나가버린 장소에 덜렁 앉아있자니 불안감이 도진다. 나는 나의 기차를 알고 있고 그들은 그들의 기차를 탄 것뿐이지만 문득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단 불안감에 몇 번이고 시간을 확인한다.

여행지에서만 겪는, 말이 통하지 않아서 생기는 불안증이라 믿고 싶다. 그러나 은연중 이게 나의 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가야 할 길을 대충 알고 있지만 남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길에 몇 번이고 불안해하고 걱정한다. 그 기차가 아니란 걸 알기에 남들 따라 올라타지도 않을 거면서 나의 기차가 오지 않음에 불안해한다. 얼마나 쓸모없고 바보 같은 걱정인지. 알면서도 멈추지를 못한다.


플랫폼에 앉은 건 노을이 질 때쯤인데 정작 기차에 앉으니 창밖이 깜깜하다. 1시간 반을 열심히 또 달려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했다. 오늘이 이곳에서의 마지막 밤이란 게 아쉬워 괜히 꽃단장을 한 역사를 구경하다가 호스텔로 향했다. 내일은 또 버스를 타고 도시를 이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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