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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JU Mar 23. 2020

잔소리 종자.


남편은 언제나 나를 믿지 못한다. 덜렁거리고 실속 없고 세상물정 모르는 모지리로 본다. 뭐 일정부분 수긍하는 구석은 있다. 나는 가격비교를 귀찮아하고 마시다 만 커피잔을 모서리에 위태로이 올려두었다가 쏟아 버리는 경우도 다반사니까. 그래도 나는 언제나 당당하다. 내가 뭐! 나 뭐!


잔소리 1번은 항상 내가 가지고 있는 컵에 대한 불안감 표명. 내 일거수일투족을 쫓아다니며 내가 내려놓은 컵의 위치를 바꿔놓는다. 내가 이 잔소리로부터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시간은 다들 잠들고 난 뒤 맞이하는 새벽. 호기롭게 맥주를 따고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숨쉬듯 자연스럽게 맥주를 쏟았다. 


맥주캔을 들었을 때 나는 당연하게도 힘을 양껏 주지 않았고 그런 나를 비웃는 저 얄미운 맥주캔은 손에서 쉬이 미끄러져 키패드 앞에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울컥울컥 쏟아져 미끄러지는 거품을 망연자실 바라보며 내뱉는다. ‘이런 젠장.’


필요 없다고 없다고. 쓰라고 쓰라고. 강제 구매 당한 키패드 보호구도 나의 신들린 타자감을 방해한다며 진즉 벗겨버린 후라 타격은 더 크다. 서둘러 물티슈로 닦고 진동하는 맥주냄새를 지우기 위해 초를 세 개나 태웠다. 나의 완벽 범행이 부디 들키지 말아야 할텐데. 이렇게 남편에게 말하지 못할 나의 비밀이 한가지 더 늘었다.


“거봐 내 말이 맞잖아. 너 이럴 줄 알았다.” 


이 말이 그렇게 듣기가 싫은 건 반박의 여지가 없기 때문. 상대가 실수를 하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꼬집고 조롱하는 것이 우리 부부의 유머코드. 


주로 이 대상은 며칠 째 감지 않아 잡채가 된 머리칼, 바지 가랑이에 호두만한 구멍이 난걸 발견했을 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얼굴을 마주하고 사이좋게 주고받는 입 냄새 등 외부인에게 쉬이 노출하기 꺼려지는 자연인의 모습이다. 


상대가 선제 공격을 하면 더 풍부한 묘사와 어휘를 덧붙여 방어전을 펼치며 피 튀기는 각축을 벌이는데 오늘과 같은 실수는 내가 치고 들어갈 구석이 없다.


이런 일은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오후에 비가 올 것 같다고 우산을 챙겨가라는 엄마의 잔소리를 “어어-“ 하고 귓등으로 넘기며 빈손으로 집을 나선 후 하교 길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마주했을 때 드는 머쓱함과 같다. 


상대의 관심 어린 시선으로 만들어진 걱정을 그 것을 실행함에 있어 해야 하는 행동이 어쩐지 거추장스럽게만 느껴져 상대의 의견을 잔소리로 넘겨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에잇, 엄마 말 들을껄.” 하는 상황이 온다. 지금처럼.


나는 여전히 대충 살고 있다. 손이 쉽게 닿는 식탁 모서리에 컵을 올려두고 가방을 무겁게 하는 우산을 집에 둔 채 길을 나선다. 잔소리 종자인가 싶은 내게 남편은 한마디 덧붙일 것이다.


좀 더 고생해봐야 알지 나중에 내 말 듣고 후회해도 소용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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