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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뭉클 Apr 15. 2023

당신도 부모님의 보호자가 되었나요

며칠 전, 20년 지기 친구 E가 운전 연수 업체를 물어왔다. E네 아버지는 얼마 전 전립선암 수술을 받았다.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다니기 위해 E는 지갑 속에 잠들어있던 운전면허증을 꺼냈다. 가족들을 태운 차의 운전대를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E는 서툰 운전을 시작할 것이다.      


부모님의 보호자가 되는 인생의 시점이 있다. 나는 20대 후반, 서른 살 즈음이었던 것 같다. 직장에 들어가 스스로를 먹여 살릴 수 있게 되고 아버지의 빚을 갚아가던 때. 검게 좀먹어가는 아버지의 뇌 사진과 검사지들이 하나같이 치매를 가리켰을 때. 시트가 떨어져 가루처럼 묻어나는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의 푸른 화면을 생기 없는 빈 눈으로 응시하고 있는 아버지를 보며. 가끔 병원에 모시고 가는 게 내 역할의 전부가 아니라 아버지 생의 모든 걸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마주했다.      


돈이라도 많았으면. 그래, 우리 집이 돈이라도 많았으면 압박감이 덜 했겠다. 이백만 원 남짓한 내 월급으로... 도대체 앞으로 아버지에게 들어가야 할 병원비는 얼마나 되며 생활비는? 내 월급에서 얼마를 모아야 간병을 해낼 수 있을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노후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은 부모의 보호자가 된다는 것은 그저 부모님 손을 다정하게 잡고 걷는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내가 부모님 목숨의 무게를 짊어지게 되었다는 말이었다.       


서른. 사회적으로 어른이란 타이틀을 얻은 지는 꽤 지났는데 준비가 안 됐다고 느꼈다. 사소한 선택을 앞두고 항상 갈팡질팡한 내가, 아버지 삶에서 중요한 선택을 대신할 수 있을까. 직장 생활을 하는 것만으로도 기진맥진 내 하나 책임지는 게 버거운 내가, 부모님의 버팀목이 될 수 있을까. 이를 감당할 만큼 강하지 못한 것 같았다. 자신이 없었다.    

  

아임 레디..!라고 외치지 못했지만 여부는 상관없었다. 병원에서 아버지 이름을 호명하면 내가 대신 대답하고 옷가지들과 가방을 챙겨서 아버지 손을 이끌어 진료실 앞에 섰다. 진료실에서 아버지 증세를 본인보다 더 잘 설명하는 것도 나였고 어떤 검사를 받을지 결정하는 것도 병원비를 결재하는 것도 나였다.      


원래대로라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의사 선생님이 청진기를 대도록 내 옷 윗도리를 걷어 올려주던 이는 아버지였다. 교복을 맞추던 날 돌려 막고 있는 카드라도 내 손에 쥐어주던 이도, 대학 졸업 후 취업을 포기한 채 시험 준비를 다시 하겠다고 고시원에 틀어박혔을 때 내 방 작은 냉장고에 홍삼을 넣어주던 이도 아버지였다. 지금까지 그저 나는 아버지의 딸이면 됐는데… 누구의 딸이라는 건 처음부터 그 누구의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진작부터 내포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다만 난 그 사실을 이제야 직면하게 된 것이다.     

 

물러설 수 없는 존재가 그 인생을 내게 기대올 때, 어깨를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아버지는 물러설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내어줘야만 했던 것도 한편 내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은 미룰 수 있다면 최대한 미루고 싶었다. 아버지에게 찾아온 치매에게 왜 이리 빨리 왔냐고, 우리 집 형편이 너를 맞이할 형편이 안 된다고... 하고 싶었지만 누구네집 창문보다 작은 알루미늄 샤시와 유리로 만들어진 가벼운 현관문을 치매 놈은 쉽게 열고 들어와서 안방을 턱 하고 차지하고 앉았다. 준비를 마친 채 치매를 맞이할 수 있는 집은 이 세상에 없겠지만 우리는 돈도, 엄마도, 차도, 뭣도 없이 그야말로 맨몸으로 맞닥뜨렸다. 어머니가 아버지 곁에 계셨더면 동생과 나의 부담이 덜했을 것 같다. 아버지는 기댈 곳이 우리 밖에 없었다. 나와 동생은 치매에 걸린 아버지의 오롯한 보호자가 되었다. 

     

치매는 10년 동안 아버지만이 아니라 나와 동생의 삶을 뒤바꿔놓았다. 약해빠진 난, 저 위 난간 펄럭이는 창문 앞에 날 세우는 상상을 하곤 했다. 크게 달라진 것 없는 날들인데도 어느 날은 그날이 꼭 내 한계인 것만 같다. 항상 도돌이표인 물음-답 사이를 벗어나지 못하는 무력함. 경제적 심리적 압박감, 아버지와 동생에 대한 죄책감. 나보다 더 힘든 동생을 두고 나는 이렇게 힘들어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몰아세웠다. 그동안의 내 삶은 ‘살았다’는 말보다 ‘살아졌다’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살아졌다. 생각보다 생은 끌어가는 힘이 컸다. 폭풍 같은 순간을 지나 실컷 울고 나면 마음은 또 일어설 채비를 했다. 더 이상 못하겠다고 나자빠져 있을 때도 질질, 생은 끌고 갔다. 누굴 만나든 마음이 무거웠고 별거 아닌 걸로 가벼워지기도 했다. 화를 내다가 미안해지고, 아버지로 인해 살기 싫어지다가 아버지가 없으면 살지 못할 것 같았다. 덩어리 진 막막함도 순간순간 잘게 쪼개져 이겨내기도 하고 주저앉기도 했다.

      

그 와중에 그럼에도 끈질기게 행복하고 싶었다. 행복을 좇는 본능은 인간에게 날 때부터 세팅되어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이렇게 끈덕질 수가 없다. 그 본능은 어둠 속에서 숨을 고르며 의미를 찾게 했다. 어두움을 통해서 사람이 깊어질 수 있다는 말을 믿었다. 이토록 못살게 굴고 있지만 날 사랑했던 아버지를 사랑하고 싶었다. 그리고 아버지도 우리의 사랑을 느꼈으면 했다. 작은 말과 행동에서 서로를 향한 사랑을 발견하며 웃고 싶었다.    


동생이 아버지 침대에서 잘 보이는 자리에 붙여두었다. 볼 때마다 우리 사랑을 느낄 수 있게


아버지와 동생을 뒷좌석에 태운 내 차는 길을 한참 헤맸다. 갈림길에서 틀리고 또 틀렸다. 급한 차선 변경과 유턴이 난무했다. 새로운 경로를 찾다 지친 네비는 작은 동그라미를 도로록 도로록 그리며 한참을 고민에 빠졌다. 앞으로 아버지 간병을 어떻게 할 건지 나와 언쟁을 벌이던 동생도 심각성을 느꼈는지 가만 입을 닫았다. 오늘 중으로 집에 갈 수 있을까 초조해졌다. “아빠, 조금만 참아. 여기서 오줌 싸면 안 돼.” 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빨리 어떻게든 집에 가야 한다는 마음을 콱 먹었다. 몇 번의 고비를 넘어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외출로 들떠있던 아버지는 평소보다 많이 걸은 탓에 집에 오자마자 화장실에서 시원하게 큰일을 보았다. 어젯밤부터 싸웠던 나와 동생은 화장실에서 정말 다행이다를 외치며 웃었다. 


함께, 아버지와 함께 행복하고 싶다. 아버지의 유일한 도피처가 된 내가 더 단단해졌으면 좋겠다. 


봄비가 토닥토닥 땅을 두드리며 생명을 팽팽하게 한다. 다시, 우리에게 봄이 찾아왔다.  



         






동생이 운영하는 유튜브 "아빠와 나"입니다. ^^

https://www.youtube.com/watch?v=oTYt0tqm7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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