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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뭉클 Aug 14. 2022

아빠가 울고 있었다.

요양원밖에는 방법이 없는 걸까 

일주일 만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아빠가 보였다. 무릎 위에는 우리가 만들어준 노래책이 너덜너덜해진 채 놓여 있었다. 옆 자리에는 한 파파 할머니의 입에 요양보호사분이 죽을 떠먹이고 있었다. 다른 요양보호사분은 옆 책상에 앉아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뭐라고 하는 거지? 듣는 이 없는 아빠의 혼잣말은 중얼중얼 스스로에게 삼켜졌다.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처럼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혼자 울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누구도 고아가 된 아빠의 마음을 들어줄 여력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또 혼자였다.    

 

“아빠! 아빠! 아빠 우리 왔어.”

외로움에 잠들어있는 눈동자를 흔들어 깨웠다. 아빠는 나와 동생의 손을 붙잡았다. 

"어.. 어떻게 너희가 여기를 어떻게 왔어?" 

내가 바로 이곳으로 아빠를 보낸 장본인 줄도 모르고, 무척 반가워한다.    

  

봄에는 앞마당에 소담한 꽃들이 피고, 조금 걸어 나가면 야트막한 숲길이 있는 아담한 전원주택. 치매 간병 4-5년, 우리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한계에 다다랐다. 고심 끝에 아버지를 이곳 요양시설로 모셨다. 이곳은 노인공동생활가정으로 많은 사람이 일률적으로 움직이는 요양원보다 더 집 같고, 사람 사는 것 같아 보였다. 방 4개, 화장실 1개, 거실에서 9명의 노인들이 요양보호사분들과 함께 지냈다. 여섯분의 할머니와 세분의 할아버지가 이곳에서 살았다. 아빠는 할아버지 두 분과 한방을 썼다.      


집에 있어도 집에 가겠다고 뛰쳐나가 거리를 헤매던 아빠였다. 더 이상 집에서 모실 필요가 없다며 요양시설로 옮기겠다는 이유를 하나 더 추가했었다. 

요양시설에서 살게 된 아빠는 여기가 어딘지 제대로 알 순 없었지만, 자신이 홀로 되었다는 것은 가슴 시리게 느꼈다. 딸들이 없는 곳은 정말로 집이 아니라는 걸 아는 것 같았다. 이곳에 온 후, 며칠은 창문을 깨서라도 집에 가겠다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가 이미 돌아가신 지 10년도 되었던 어머니를 소환해서는 어머니가 아파서 집에 꼭 가야 한다며 통사정을 하기도 했다.      


사정이 이러저러해서 어쩔 수 없이 요양시설로 모시게 되었어라는 말을 아빠의 머리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요양원이 무엇인지도, 인과관계를 이어낼 수도 없었다. 집에 가겠다고 난리를 치는 아빠의 지갑에 쪽지를 써서 넣었다.      


‘여기가 아빠 집이야. 밥도 공짜로 준대. 여기서 있으면 월급도 받을 수 있어. 우리는 직장 가서 일하고 올게.’     

60대 중반부터 직장을 그만두고 아무런 노후대책 없이 딸들에게 용돈을 받아서 지내던 자신을 미워했다. 치매로 인해 같은 말을 또 하고 또 하던 때. 같이 식사를 하러 가면 ‘너 돈 있냐?’라는 말을 수십 번도 더 물었다. 치매는 가족의 이름은 지웠지만, 평생을 돈 걱정하며 살았던 가난의 기억은 지우지 못했다. 

집에 가겠다고 난리를 치는 아빠에게, 이곳은 밥도 공짜고, 월급도 받는다는 메시지를 보여주며 설명을 해주면, 한동안은 잠잠했다. 원장님에게 봉투에 몇만 원을 넣어서 월급이라며 주도록 했다. 요양시설에 머물게 하려고, 돈을 벌고 싶어 하는 아빠의 마음을 이용했다.      


아버지는 우리를 그리워했다. 우리를 만나면 몹시도 반가워했다. 너희가 없으니 심심하다고 했다. 아버지와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한 후 저녁 식사 전에는 헤어져야 했다. 집으로 돌아가려는 우리의 인사는 매번 같았다.      

"아빠, 이제 우리는 일하러 갈게. 일하고 내일 다시 올게. "

"나도 같이 갈까?"

아빠는 조심스레 집에 같이 가도 되는지 물었다. 

“직장 때문에 아빠는 가도 집에 혼자 있어야 해. 같이 갈 수 없어. 우리가 또 올게”

“......”

같은 질문을 반복하던 아빠는, 이상하게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2-3달이 지나자, 집에 가겠다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점차 아빠의 모습이 같은 방에 계신 할아버지와 똑같아졌다. 관리하기 쉽게 머리는 듬성듬성 짧게 잘렸다. 민숭민숭해진 머리는 하얀 머리털들이 쪼뼛쪼뼛했다. 옷에 이름을 써두었지만 옷가지들은 뒤섞였다. 어떤 옷을 입든 말든 할아버지들은 관심이 없었다. 모두에게서 같은 냄새가 났다.      


요양보호사분들은 아빠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영상, 잘 차려진 밥상, 식사를 잘하는 사진, 색칠공부를 하는 모습, 마당에서 햇빛을 쏘이고 있는 사진들을 종종 보내주었다. 사진을 보며 그렇게 잘 지내길 바랐다.      


하지만, 아빠는 울고 있었다. 깜깜한 밤 가족들이 없는 곳에서 홀로 몸을 누였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타인과 같은 방을 쓰는 게 더 외로웠는지도 모른다. 집에 가고 싶다고 호소하고 소리를 질러봐도 갈 수 없었다. 혼자 울고 있는 아버지를 본 후에도 나는, 아버지의 외로움의 무게보다 우리의 괴로움이 더 크다며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선을 그었다.      


그 사이 치매는 더 빠르게 달렸다. 몇 개월 사이 막내딸의 이름마저 잊었다. 폭력성도 점차 더 심해졌다. 데이케어센터에서처럼, 요양보호사분들의 태도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어느 날 원장님이 아버지 케어가 어려우니, 남자분이 원장님으로 계신 노인공동생활가정으로 옮기는 것이 어떠냐 했다. 노인공동생활가정의 특성상 요양보호사분들의 인원이 적고, 이곳은 특히 남자 요양보호사 선생님이 없었다.      


추천받은 다른 노인공동생활가정을 방문했다. 차에서 내리자, 화단에 있는 개 3마리가 우리를 빤히 쳐다봤다. 길이가 짧은 쇠로 된 목줄이 채워져 있었다. 밥그릇과 개집만 오갈 수 있는 답답한 목줄을 바라보며, 불편함을 느꼈다. 개들은 짖지도 않았다.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한편에서 어르신들의 식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원장님의 어머니라는 분이 한 할아버지의 식사를 돕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자 분통을 터뜨렸다. 원장님은 본인의 어머니에게 아무런 제재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곳을 나왔다.      

   

작은 규모의 노인공동생활가정이 아닌, 좀 더 체계적이고 다양한 프로그램과 인력이 있는 요양원을 찾아보기로 했다. 큰아버지의 지인이 계신 곳으로 추천을 받았다. 남양주에 있는 5층 건물의 요양원이었다. 현관에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시설평가에서 최우수기관(A등급)을 받았다는 명패가 붙어있었다. 아버지는 첫 요양시설이었던 노인공동생활가정에서 7개월의 생활을 마치고, 영문도 모른 채 옮겨졌다.  







*사진출처 : 삼성디스플레이 뉴스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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