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고막이 녹았다.
지금은 조금만 아파도 병원을 찾는 프로 엄살러지만, 어릴 땐 아픈걸 잘 참아야 착한 아이인 줄 알았다. 갑자기 내가 티비소리를 너무 크게 하고 들으니까 이상해서 병원에 데려갔더니 왼쪽 고막이 녹아있었다더라. 중이염이 심하게 온걸 눈치채지 못해 생긴 일인데 다행히 어릴 때라 고막도 자라서 약간의 구멍만 남겨둔 채로 초등학생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안타까운 게, 고막에 구멍이 뚫려있으니 머리 감을 때도 항상 조심해야 하고 수영장은 절대 못 갔다. 학교에서 단체로 수영장을 갔는데 나만 선생님들과 카페 같은 곳에서 쿠키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5학년, 2002년 월드컵이 한창일 때 나는 고막에 생긴 구멍을 막는 수술을 했다. 그러고 순천에서 광주까지 두 시간 정도 걸려가며, 광주의 전남대병원에 통원치료를 다녔다.
아빠랑 다니는 병원 데이트
학교에서 조퇴를 하면 아빠가 날 데리러 왔다. 그때 아빠가 뭘 하다 왔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학교를 조퇴했기 때문에 신나는 마음이 컸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빠에게 왕복 네 시간이 걸리는 길은 힘들었을 것 같다. 철없는 딸은 고속도로 초입에만 재잘거리다가 금세 자버렸으니까 졸리기도 했을 테고, 놀러 가는 게 아니라 병원을 가는 거였으니 사실 좋을 게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나에게 그 시절은 너무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아빠는 꼭 김밥 2개에 단무지 하나
학교를 나와서 점심은 차에서 해결했다. 우리가 좋아하는 김밥집에서 특별할 것 없는 일반 김밥 두 개를 산다. 단무지는 네 봉지 정도 챙긴다. 투박하게 호일에 싸진 김밥을 열고 김밥 버거를 제작한다. 김밥 두 개 사이에 단무지 하나를 껴서 김밥 버거를 만들고 그대로 운전하는 아빠 입에 넣어드렸다. 아빠는 입안 가득 음식을 넣고 씹는 게 좋다며 환하게 웃으신다. 나는 아빠가 뭘 하든 따라 하고 싶었으니까, 나도 가득 먹는 게 좋다며 김밥을 두 개씩 먹곤 했다. 그렇게 배를 채우고 나면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얘기한다. 고무줄놀이했는데 내가 제일 못한다고 친구들이 날 안 뽑아준 이야기, 아기 염소 동요를 개사해서 부른 이야기 등 그때 학교에 있었던 핫이슈를 한창 이야기하고 나면 슬슬 따뜻한 햇살 덕에 졸리기 마련이다. 지금 생각하면 아빠는 관심도 없는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셨다. 내 돈 내놔 이년아 못주겠다 X 년아~라는 가사로 노래를 부르는데도 우리 아빠는 허허허~가 끝이었다. 내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의자를 뒤로 끝까지 젖혀서 푹 잠을 잤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마음이 포근해지고, 안도감이 생긴다. 세상에서 아빠 차만큼 안전하고 든든하며 잠이 잘 오는 곳이 또 있을까.
광주에서 맛집 투어까지 하면 완성
귀를 보는 일은 생각보다 아프다. 지금도 가끔 검진하러 가서 소독약만 바르는데도 아플 때가 있다. 그때는 염증이 자주 있었기 때문에 조금만 건들어도 아팠다. 그런데도 광주 가는 길은 즐거웠다. 병원이 끝나면 아빠가 광주에서만 먹을 수 있는 맛집을 데려가기 때문이다. 형제가 많아서 나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일이 별로 없는데, 아빠랑 단둘이 맛집 데이트를 할 수 있었기에 병원 가는 길은 언제나 신나는 길이었다. 광주에서 유명한 연포탕을 처음 봤을 때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엄마가 낙지 알레르기가 있어서 생낙지를 본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생낙지를 끓는 물에 넣는 광경은 세월이 지나도 뇌리에 딱 박혀있다.
아빠의 사랑 덕분에
사실 비단 아빠뿐만 아니라 엄마 아빠의 돌봄덕에 지금은 완벽하게 치료되었다. 아주 약간의 후유증이라면 귀지가 밖으로 배출이 잘 안되어서 귀지가 잘 끼고, 가끔 곰팡이가 잘 생기는 것. 하지만 관리만 잘해주면 무리 없이 잘 지내고, 이제는 스노클링과 스킨스쿠버 다이빙도 할 수 있다. 올여름에는 꼭 서핑에 도전해볼 것이다. 마치 소풍처럼 갈 수 있었던 병원 나들이. 서른이 된 지금도 그때 아빠의 마음이 어땠을지 감히 가늠해보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