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괭이네 집 Oct 14. 2021

조선시대 연애 시를 대하는 21세기 모쏠의 자세

너의 입시 일기 1

요즘 아이들의 사춘기를 지칭하는 대표적 말 중 하나가 중2병이다. 중2병이 단지 중학교 2학년만 지칭하는 것은 아님은 누구나 다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상 중학교 시절 전체가 이 중2병과 함께 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예비적 증세를 보이는 중학교 1학년, 본격적인 병증(?)에 시달리는 중학교 2학년, 이제는 갱년기인 엄마와 부딪치다 못해 하나씩 패배를 선언하는 중학교 3학년까지. 모두 다 힘겨운 중2병을 우리 모녀가 사뿐히 건널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바로 확실한 백신이 맞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 백신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말씀드리는 것이 인지상정(잠시 포켓몬스터의 로켓단에 빙의)이겠지만, 사실 이렇다 할 답은 없다.


그냥 우리 모녀는 남들이 3년 동안 치르는 사춘기 갈등을 16년에 걸쳐 나누어 치른 것도 모자라 플러스 2년을 추가하고 있는 중이다. 자타공인 한 성질 하신 엄마를 닮아, 아니 그보다 업그레이드된 버전이신 우리 집 고딩은 성질과 말빨 모두 엄마를 제압하기에 충분하였다. 서로의 논리적 약점을 공격하는 다년간의 전투로 설전에 충분히 단련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글의 핵심은 이것이 아니다. 무더위가 한풀 꺾이고 가을바람이 솔솔 불어, 이제야 좀 살 만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다가오는 그놈. 바로 10월의 악마, 중간고사라는 놈이렷다. 이 이야기가 오늘의 주인공.


우리 집 고딩에게도 호환마마보다 더 무섭다는 시험이 찾아왔다. 사실 그녀가 시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대단한 성장이다.


이 고딩은 본래 세상 '해피' 한 녀석인 데다, 입에 "냅둬~"라든지 "그러든지"를 달고 사는 초특급 귀차니스트이다. 등 따시고 배부르면 세상만사 불평불만이 없는 녀석이기도 하다. 시험 때라고 달랐을까? 중딩 때만 해도 시험기간에도 시험은 뒷전이고 동생의 사랑을 쟁탈하겠다고 엄마와 쟁탈전을 버렸던 문제의 여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이제 시험이라고 교과서와 문제집을 들고 엄마를 찾는, 실로 천지개벽할 시추에이션을 보여주고 있으니... 실로 대한민국의 입시교육이 가진 어마 무시한 위용이 아닐 수 없다. 이제는 무려 입시의 최전선을 목전에 둔 고2란 현실. 아~ 통재라. 우리 앞에 고생길이 훤하다.


그런데 문득, 꼭 1년 전의 가을이 떠오른다. 때는 바야흐로 고1 2학기 중간고사, 그녀가 내게 내민 것은 다름 아닌 시조였다.


사실 그녀와 나 사이엔 암묵적인 룰이 있으니, 국어공부는 같이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처음엔 나 역시 자신이 있었으니까. 대학교부터 대학원까지. 10년 공부를 학원강사로 먹고살았던 빵빵한 경력. 게다가 "난 무려 국문학 박사 나온 여자"이니...는 무슨!!!


10년 경력도 10년 훌쩍 넘게 묻어두면 경력단절이고, 비평과 연구 경력으로는 국어 시험공부를 커버해줄 수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무엇보다 시간 단축과 족집게가 필수인 학업의 세계에서 나는 순발력도 자료도 모두 제로인 선생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당시에 그녀가 내민 시조는 나의 영원한 동경이었던 황진이. 대학 시절 황진이에게 매료되어 그녀의 행적을 추적해보았던 전적도 있던지라, 나도 모르게 으쓱했다. 더구나 연애 시! 이 엄마가 연애 칼럼의 저자였음을 살뜰하게 기억해준 딸의 센스~는 절대 아니고, 그저 뭔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투정에 일단 함께 읽어 나가기로 했다.


동지(冬至) 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여,

춘풍(春風) 니불 아레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이 아름다운 고전의 묘미를 함께 나누고자 했건만, 이 고딩과 나의 감성은 평행선을 달렸다. 이미 첫 줄부터 망feel이 느껴졌다.


"동짓달 밤을 왜 잘라? 하지에 낮을 자르면 안 돼? 굳이 왜 추운 날 밤을 잘라?"


그래, 내가 가장 중요한 것을 잊었구나. 우리 집 그녀는 완벽한 모이라는 사실 말이다. 동짓달 밤을 끊어 고이고이 간직하다 님이 오신 밤에 풀어놓겠다는, 그 고귀한(?) 사랑의 정신을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것으로도 모자라 나의 동경이자 매혹이었던 황진이를 한순간에 찐따로 만들어버린 이 문제의 고딩.ㅠㅠ


"뭘 기다려? 미남은 쟁취하는 거야. 가서 잡아와야지."


그래, 그 또한 네 말이 맞는구나. 참고 기다린다고 사랑이 절로 오면 그 누가 고통받겠니? 사랑은 돌아오는 게 아니라 낚아채야 하는 거라고, 나는 그날도 한수 배웠다.


우리 집 고딩의 고전 학습 결론은... 조선시대 연애는 후졌다.ㅠㅠ 


나는 우리 진이 언니는 그런 분이 아니시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그날 이후 우리 집 고딩은 내게 국어책을 들고 오지 않았다고 한다.



작가의 이전글 청춘기록, 박보검을 다시 파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