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롥호롞 Feb 15. 2020

자신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조심한다는 것과 같다.

사실 애정결핍을 갖고 있는 이들이 사랑을 믿지 않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믿었던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의 영향이 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탈무드에는 ‘나와 상관없는 백명의 모략보다 친구의 무심한 한마디가 더 큰 상처를 남긴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곧 나와 상관이 없는 사람, 내가 믿지 않는 사람이 하는 말이나 행동은 훌훌 털어버릴 수 있지만 의외로 나와 가까운 사람, 믿고 또 믿어야 하는 사람의 말이나 행동은 쉽게 마음에 상처를 주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는 ‘사람의 원수가 자신의 집안 식구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가족이라고 언제나 내 편이 되고 나를 지지해주는 것이 아니며,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고, 사랑하는 연인이라고 늘 내 편이 되어 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애정결핍을 갖고 있는 이들을 살펴보면 그들이 갖고 있는 애정결핍의 원인이 다른 환경에서 자란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게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가족처럼 가까운 사람은 믿기 싫어도 믿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사랑한다고 믿었던 부모님이 내가 원하는 만큼 내게 사랑을 주지 않았을 경우 혹은 나를 사랑한다고 믿었던 연인이 실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을 경우, 아니면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했을 경우, 우리는 쉽게 사랑을 믿지 못하게 될 수 있다. 


만약 가족이나 친구가 절대적으로 신뢰해야만 하는 존재라고 한다면 가족이나 친척, 친구로 인한 사기나 온갖 범죄, 역사적으로 나타난 이런저런 사건과 사고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권력을 위해서 형제를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몰아내고 부모의 자리를 차지하거나 돈 때문에 가족이나 친척끼리 다투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음을 안다. 즉 단지 나와 가까운 사이라고 해서 마냥 원하는 만큼 사랑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이들이 쉽게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이 나빴던 거라고, 내 탓이 아니었다고 여길 수 있어야 하는데, 그 대상이 보통은 가족이나 친구 등 가까운 사람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프로이트의 말처럼 감정을 싫어서 상처를 받았을 때 했어야 했던 적절한 반응, 곧 내가 얼마나 기분이 나빴고 얼마나 화가 났으며 얼마나 슬펐는지, 얼마나 싫었는지를 인식하고 표현할 수 있어야 상처를 극복할 수 있는데, 상처의 원인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가까운 누군가를 ‘나빴다’, ‘잘못했다’라고 여기는 것이 되기 때문에 쉽게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가족으로 인해서 마음에 상처가 생겼는데, 그것을 가족 때문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쉬울까? 오래된 친구 때문에 상처를 입었는데, 내 마음의 상처가 오래된 친구 때문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쉬울까? 너무 사랑하는 연인으로 인해서 상처를 입었다면 그 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고 인정하는 것이 쉬울까? 만약 인정하게 된다면 더는 가깝지 않게 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너무 따뜻하면 쉽게 상처를 입는다. 너무 착해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을 쉽게 믿고 상대방에게 맞춰주는 사람은 쉽게 상처를 받는다. 우리가 마음이 건강한 사람을 살펴보면 마음이 건강한 사람들은 적당히 나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달리 말해서 너무 따뜻하지만 않고 적당히 차갑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이 자존감이 낮다면 성벽이 어느 정도 허물어져 있는 상태와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랑받고 싶은 만큼, 인정받고 싶은 만큼 주변의 사람들을 쉽게 믿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리고 쉽게 믿는 만큼 쉽게 상처를 받게 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자존감이 높은 사람과 자존감이 낮은 사람을 만난다면 자존감이 높은 사람에게는 항상 조심하게 되지만, 자존감이 낮은 사람에게는 덜 조심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해서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처음에만 조심하게 되고 막상 만나기 시작하면 쉽게 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도 된다고 느껴지니 말이다. 


내가 상대방을 조심하지 않으면 상대방도 나를 조심하지 않는다. 내가 자존감이 높은 사람을 대할 때 조심하게 되는 이유는 그 사람이 나와 만나는 것을 조심스러워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내가 자존감이 낮은 사람을 대할 때 조심하지 않게 되는 이유는 그 사람이 나와 만나는 것을 전혀 조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쉽게 그리고 단숨에 마음을 열어주지 않기 때문에 상대방이 나를 계속 신경 쓰게 만들지만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쉽게 그리고 단숨에 마음을 열어 주기 때문에 별로 신경 쓰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도 된다고 느껴지니 말이다. 


흔히 쉬운 사람, 곧 쉽게 누군가를 만나고 쉽게 차이면서 상처를 입는 유형의 사람 대해서 주변 사람들은 ‘자신을 소중히 여겨’라는 식의 조언을 해주고는 한다. 자신을 소중히 여긴다면 쉽게 만나고 쉽게 차이지는 않게 될 거라면서 말이다. 


자신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서 상대방이 아무리 괜찮은 사람처럼 보여도 단숨에 지나치게 상대방이 내 안에 들어오게 허락하지 않고 적당히 경계하며 대한다는 것이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이 쉽게 상처를 받지 않는 이유는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 마음의 문을 열기 전에 충분히 상대방을 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며, 또한 막상 누군가를 만나도 단숨에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 천천히 경계하면서 마음의 문을 열기 때문에 상처를 받을 일이 별로 없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반해서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 충분히 상대방을 알아보지 않고 쉽게 마음의 문을 열며, 마음의 문을 열어도 서서히 열지 않고 단숨에 열기 때문에 상처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자존감이 낮으면 조심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내가 조심스러워하고 천천히 마음의 문을 열면 사랑받지 못하게 될까 봐 무섭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조심함으로 인해서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가 사랑받지 못한 이유가 내가 조심한 탓이 아니라 상대방이 괜찮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내가 원하는 만큼 나를 사랑해줄 수 없는 사람에게 사랑받고자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사랑은 쉽지 않다. 사랑을 주고받는 것이 쉬웠다면 아마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자존감이 낮은 사람,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그만큼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은 것이 어렵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쉽게 괜찮은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쉽게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허기진 사람이 허겁지겁 밥을 먹다가 체할 수 있는 것처럼 너무 급하게 마음을 여는 것이 아니라, 조금 여유를 가지고 마음의 문을 열어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럴 때 별로인 사람을 만날 가능성도 누군가를 사랑함으로 인해서 상처 받을 가능성이 줄어들게 될 테니 말이다. 


          




참조

<탈무드 잠언집 – 마빈 토카이어 지음, 현용수 편역, 동아일보사, p312~313>

<정신분석 강의 – 지그문트 프로이트 지음, 임홍빈, 홍혜경 옮김, 열린책들, p38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