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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잭변 LHS Feb 26. 2023

[초단편] 어느 패잔병의 모습

전쟁이 잠식한 영혼의 모습

“이반, 점심은 먹었어요?”


알리나가 문을 열고 짐을 식탁에 놓으며, 집안 어딘가에 있을 이반에게 큰 소리로 안부를 묻는다. 집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알리나는 싱크대에 놓여 있는 그릇들을 바라본다. 역시 누군가가 이반을 찾아온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이반! 저 왔어요. 알류나에요. 아직 자고 있는 거예요?”


알리나는 부엌과 거실을 지나, 침실 문을 연다. 역시 이반은 침실에 홀로 누워 있었다. 이반은 알리나가 침실 문을 여는 소리에야 잠에서 깬 듯, 눈을 겨우 뜨며 알리나가 침실로 들어오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기만 한다. 알리나는 이반이 침대 옆에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이반의 양말을 한 손에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침실의 쓰레기통을 가지고 거실로 나오며 투덜거린다.


“일주일에 한 번 오는데, 그래도 저 오는 날에는 좀 일찍 일어나 봐요.”


알리나가 거실에서 정리하며 부산을 떠는 동안, 이반은 옷을 챙겨 입고 느린 걸음으로 거실로 나온다. 이반은 알리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소파를 뒤적거리다가 리모컨을 찾고서는, 티브이를 켠다. 티브이에서는 시사대담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다.


티브이에서 대머리인 사회자가 이야기를 꺼낸다.

”우크라이나와 휴전한 지 10주년이 되었지만, 우리 러시아의 경제상황은 좀처럼 나아지고 있지 않습니다. 자연 인구는 급감했고, 국가 간의 인력유치 경쟁은 더 치열해져서 젊은 인력들도 모두 러시아로부터 탈출하고 있습니다.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교수님? “


백발의 교수가 대답한다.

“러시아가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탓이죠. 전 세계는 인력을 유치하기 위해,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경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기점으로 피라미드형 사회구조를 만들었어요. 정치적인 목소리도 자유롭지 않은 나라가 되어 버렸어요. 그런 사회에서 누가 살고 싶어 하겠습니까? 러시아는 민족주의라는 이름하에 다른 나라의 우수한 인력을 끌어들이려는 노력도 하지 않아요. 이대로라면 우리 인구는 2035년이 되면 우크라이나 전쟁 휴전 이후 3분의 2 정도로 감소합니다. 전 세계에서 러시아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은 계속 줄어들고 있어요. “


알리나는 거실 테이블에 놓인 맥주병들을 주방으로 가져가며 티브이 속 교수를 향해 중얼거린다.

“어유, 저 양반 5년 전만 해도 바로 잡혀갔겠네.”

하지만, 티브이 속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백발교수가 러시아를 비판하는 이야기를 계속 쏟아냈지만, 시사프로는 계속되고 있었고, 대머리 사회자는 백발의 교수의 말에 이어 질문을 던진다.

“그래도, 5년 전 푸틴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정치적으로는 많이 자유로워진 것 같은데요. 그리고, 러시아는 천연자원들도 많지 않습니까? “

백발 교수는 깊은 한숨을 쉬더니 대답을 한다.

“이미 자원들이 중요한 산업시대는 지나갔어요. 다양한 분야의 전문성을 가진 인력들이 협업해서 생산성을 끌어올릴 수 있는 환경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자원인 시대입니다. 협업할 인력들이 모두 전쟁으로 죽거나, 혹은 해외로 탈출한 사회에서 무슨 생산성을 더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


이반은 그냥 멍하게 티브이 화면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가, 티브이 속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의 자료화면이 나온다. 커다란 포가 연이어 불을 뿜는다. 그 포 소리가 이반을 휘감는다. 이반의 기억에 남아있던 폐허 속, 동료들이 웃으며 쏘던 총소리도 티브이 속에 울려 퍼진다. 그 소리는 이반의 비명이 되어 터져 나온다.

“아!!! 아!!! 아!!!”

알류 나는 그 소리에 놀라 얼른 이반에게서 리모컨을 빼앗아 티브이를 끈다.


“아!! 아!!!”

이반이 계속 소리를 지르는 동안, 알류나는 그를 가슴에 끌어안는다. 알류나에게 안긴 이반은 계속 소리를 지른다.


“괜찮아요.. 괜찮아.”

알류나의 목소리는 이반이 기억하는 11년 전, 어떤 우크라이나 여자의 목소리를 닮았다. 그 여자는 이반이 폭격현장을 진격하고 있을 때, 이미 러시아군의 포격에 치명상을 입고 길바닥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죽어가는 그녀의 입에서 러시아어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누구에게 그 이야기를 되뇌고 있었을까? 어쩌면 지하 대피소에 있을지도 모를 그녀의 딸들에게 해 줄 말을 조용히 되뇌고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반이 멍하니 러시아 말을 하는 그 우크라이나 여자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여자는 숨을 거두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알류나는 가장 차분한 목소리로 이반을 안고 조용히 타이른다. 이반이 전쟁에서 배워 온 비명도 차츰 잦아든다. 가슴으로 먹어 들어간 이반의 비명은, 후회의 눈물로 변해 이반의 뺨을 흘러내린다.  알류나는 조용히 이반을 감싸 안는다.



참고 뉴스 : 푸틴 콘서트 불려나온 우크라 자매…엄마는 8달전 포격에 숨졌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3779265?sid=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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