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오이지’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음식이자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다. 장미가 지고 능소화가 피여 나는 이맘때면 아버진 어김없이 ‘오이지’를 담그셨다. 지금이야 이유식도 만드는 백종원 씨처럼 요리하는 남자가 그리 특별할 것 없지만, 바로 한 세대 전인 내 어린 시절엔 <사랑이 뭐길래>(1991년)의 호통치는 대발이 아버지가 전형적인 가장의 이미지였기에 퇴근 후,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셨던 나의 아버지는 특별했다. 싱싱한 노지 오이를 깨끗하게 씻어 항아리에 차곡차곡 담아 간수를 넣어 잠기게 한 후, 묵직한 누름돌을 올려놓고 이튿날부터 오이를 서너 차례 자리바꿈 해 주고 두 주쯤 지나 냉장고에 옮겨 꺼내어 먹는데 반찬 투정을 일삼던 막내딸에겐 오이지를 얇게 쫑쫑 썰어, 얼음을 띄운 냉수에 담가 찬 밥이나 소면을 말아 주시곤 했다. 파란색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선풍기 앞에 앉아 아에이오우를 연발하다 아버지가 오이지 밥을 내어주시면 냉큼 식탁으로 달려가 앉았다. 첫맛은 아삭하고 뒷맛은 꼬들꼬들 씹히는 오이지의 식감과 향긋하게 오이 향이 밴 시원한 냉국을 들이켜면 여름날 다른 반찬이 필요 없던 우리 집만의 아빠표 별식이었다.
충남 보령이 고향이신 아버지는 가정에서 자상하셨던 만큼 주변에도 인품이 넉넉해 젊은 날에 떠나온 고향의 어린 시절 동무들과도 꾸준히 연락을 이어가셨다. 덕분에 우리 집 냉장고에는 박대라 불리는 납작한 가자밋과 건 생선과 각종 젓갈이 떨어질 날이 없었고, 일상적으로 먹는 된장찌개에도 광천에서 보내준 말린 복어가 으레 들어갈 만큼 식탁이 풍요로웠다. 우리 남매는 서울 토박이인 엄마의 깔끔한 음식보다 아버지의 뭉근하고 짭짤한 충청도 음식을 좋아했다.
우리 남매에게도 그리고 엄마에게도 큰 행복이던 아버지의 요리 실력의 이면에는 가족사의 슬픔이 서려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사법서사와 선주(船主)로 지역의 유지였던 나의 할아버지는 당시의 지식 계층에게 빠르게 전파된 사회주의에 심취하여 농지를 나누고 모두가 잘 사는 유토피아를 꿈꿨으나 좌든 우든 극단적 사상에는 모순과 비극이 따르듯 사대부가(士大夫家)로 덕망이 높던 한산 이씨(韓山李氏)의 후손임을 자랑스레 여겼던 집안의 어른들은 6.25 전쟁을 겪으며 뿔뿔이 흩어지고 할머니와 손 위 형님들 모두 난리 통에 연이어 돌아가셨다. 유복하게 자란 양반집 자손에서 풍비박산 난 집안의 고아 신분이 된 아버지는 두 살 터울의 동생과 그보다 더 어린 조카를 먹이고 가르쳐야 했기에 소년 시절부터 밥을 짓고 김치를 담그며 음식을 익힐 수밖에 없었다. 피붙이들을 돌보느라 청춘을 저당 잡혀있던 아버진 동생의 대학 졸업과 장가를 들인 이듬해 서른 살이 돼서야 비로소 대학 문턱에 들어설 수 있었다. 가족과 생이별한 모진 세월을 경험한 만큼 아버지는 가족에게 늘 따듯했고,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할 때에도 학생들 중 어려운 이는 없는지 살피셨다. 첫 번째 위암 수술을 이겨내고 다시 강단에 서던 해의 추석 명절에 아버지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와 엄마가 난색을 표했지만, 노 교수인 아버지와 어린 학생들이 허물없이 밤늦도록 학업과 세상 사는 이야기꽃을 피우다 갔던 그 해 추석이 아버지와 시끌벅적하게 보낸 마지막 명절이 되었다.
아버지의 반찬 투정을 처음 보던 날
자식들에겐 항상 정성껏 식사를 만들어 주시던 아버진 정작 당신께서 때늦은 시간 허기에 드시는 식사는 고추장과 마른 멸치로 단출하게 드시는 분이셨다. 나는 아버지가 엄마에게 화를 내시는 모습은커녕 잔소리를 하는 모습조차 본 적이 없었는데, 첫 번째 암 수술을 이겨낸 후, 대학 강의도 주 1회 다시 서실만큼 회복이 되셨다고 생각되었을 무렵이던 어느 날 아침에 아버지가 식사가 영 맛이 없다 하시며 화난 아이의 표정으로 수저를 내려놓으셨다. 그날의 식사는 엄마가 잘하는 음식 중 하나인 김치찌개가 상에 올랐고 멸치볶음 그리고 새우젓으로 간을 한 계란찜으로 늘 먹던 평범한 식사였기에 처음 보는 아버지의 낯선 모습에 엄마도 나도 당황하였다. 어색해진 식사 자리를 뒤로하고 아버지가 베란다 창가에 앉아 화초를 내려다보시는데 엄마가 아버지를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여보, 눈이 좀 맑아 보이지 않네.’라고 말하였다. 다음날 병원을 찾은 후, 아버지의 반찬 투정이 간암 증세 중 하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떠난 후, 엄마도 나도 한동안 아버지 방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항암 치료를 받으며 빠진 머리를 감추려 쓰셨던 모자들이 아버지 서재 벽 한편에 걸려 있어 사회 초년생이던 나는 퇴근 후, 집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아버지의 서재에 들러 모자에 코를 박고 한참을 서 있곤 했다. 모자에선 여전히 아버지의 체취가 느껴졌다. 오래된 책에서 나는 냄새와 아빠가 쓰시던 로션 향이 베인 그 냄새에 아버지가 내 곁에 있는 것 같았다. 창밖을 내다보면, 막내딸이 제일 좋아하는 누런 통닭 봉투를 들고 웃으며 걸어오실 것 만 같았다. 임종을 지키는 순간에도, 발인을 할 때까지도 울지 않았던 나는 돌아가시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냉장고에서 이미 시들해진 아버지가 담근 오이지를 보고서야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렇게 나는 나의 아버지와 천천히 아프게 이별했고 한동안 오이지를 입에 대지 않았다.
아버지의 오이지를 다시 찾게 된 건 내가 엄마가 되고부터이다. 임신 초기 입덧이 심해 무엇을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아 고생하던 나는 아버지가 담근 오이지로 만든 냉국 생각이 간절했다. 그런데 어디서도 아버지의 오이지 냉국과 비슷한 달지 않고, 청량함을 주는 맛을 찾지 못했다. 밥심으로 산다로 할 만큼 밥순이던 아내가 고령 임신에 입덧으로 고생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남편은 그 오이지 맛을 찾기 위해 오래된 아파트 상가 반찬가게 이곳저곳을 순회하던 중, 혹시 이 맛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며 사다 준 음식이 ‘오이 물김치’였다. 분명 아버지가 담근 오이지와는 달랐지만, 개운함이 비슷한 음식을 찾은 덕의 나는 임신 기간 내내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있었고 지금껏 그 반찬 가게에서 때마다 사다 먹고 있다.
아버지와의 이별에 슬퍼하던 사회 초년생 아가씨는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어 아침이면 눈을 뜸과 동시에 밥을 달라 외치는 먹성 좋은 아이를 둔 엄마가 되었다. 요 근래 이런저런 핑계로 즉석 밥을 몇 차례 내어주었더니 어제 하원하고 들린 마트 즉석 밥 코너에서 ‘엄마 밥이네~ 엄마가 만든 맛있는 밥’이라며 리듬을 붙여 노래하듯 외치며 들고 나오는 게 아닌가.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이번 주말엔 내가 직접 아버지 표 오이지를 만들겠노라 선언하며 마트에서의 일화를 들려주니 남편은 빙그레 웃으며 "잘 됐네. 나는 당신이 말한 달지 않고 시원한 오이지를 찾느라 그리 고생했는데, 이준이는 훗날 엄마표 집 밥이 먹고 싶을 땐, 편의점만 가도 먹을 수 있잖아" 남편의 능글맞은 대답에 나도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도전해 보련다. 아버지가 만들어 주셨던 그 오이지를 내 아이에게 태어나 만난 적은 없지만, 하늘에서 분명 너를 너무도 사랑하고 계실 외 할아버지의 음식이라 설명하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