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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ko Aug 27. 2020

빛나는 무지개 물고기 말고 행복한 송사리로

“인사도 잘하고 아이 성격이 너무 좋네요. 어쩜 저렇게 낯을 안 가려요?”


타인에게 자식에 대한 칭찬을 듣고 좋아하지 않을 부모는 없을 것이다. 한국 정서 상 늘 ‘아니에요. 말 안 듣는 개구쟁이예요.’ 라 말하며 겸손을 부리지만, 내 뱃속에서 나온 녀석이 한없이 기특하게 여겨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애미의 마음이다. 미운 네 살이 된 아이는 고맙게도 놀이 학교 생활도 원만하게 잘 지내고, 동네에서도 인사를 잘하는 아이로 통할만큼 기쁨을 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간 아이를 지켜보며 성격이 천성적으로 좋은 아이구나 여기고 교우관계에 대해 한시름 놓고 있었다. 그런데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란 바로 부모가 자식을 두고 판단하는데 딱 들어맞는 논리였다. 아이를 향한 그간의 내 판단이 얼마나 적은 경험치를 갖고 판단한 것이었는지. 나는 얼마 전 다녀온 대전 나들이를 통해 그간 아이와 나누었던 대화들을 진지하게 되돌아보게 되었다.


친한 동생 부부가 6개월 차이로 출산을 하여 아이들은 생후 100일부터 친구가 되었다. 두 돌이 되기 전 까진 함께 노는 방법을 모르기에 만나도 각자 장난감을 갖고 놀던 아이들도 여러 차례 만나 오면서 서로 얼굴을 익히니 제법 잘 어울려 놀기 시작했다. 아이는 종종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전화를 걸어 달라거나 언제 또 만날 수 있는지를 물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하며 만남을 자제해 오고 있던 중 동생 부부가 대전의 한 대학 병원에 교수로 부임하며 서울에서 대전으로 이사를 가게 되어 집들이 겸 1박 2일을 함께 보내게 되었다.


8월 초입의 주말 경부선은 애지건히도 차가 막혔지만, 아이도 우리 부부도 휴게소에서 호두과자와 회오리 감자도 사 먹고 모처럼 반가운 지인과의 만남에 대전을 내려가는 내내 즐거운 마음이었다. 평소보다 두배나 더 걸려 도착한 대전에서 3개월 만에 만난 동생 부부가 준비한 맛있는 식사를 나누며 그간 못다 한 이야기와 안부를 나누었다. 아이도 오랜만에 만난 친구도 반갑고 여행을 온 것이 좋은지 부쩍 신이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맥주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아이들이 노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나는 거실에서 들려오는 내 아이의 말이 조금 거슬리기 시작했다. 우리 아이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동생 부부의 아이는 차분하고 젊잖은 부부의 성격을 그대로 닮았다. 아직 내 것에 집착이 먼저인 나이임에도 집에 놀러 온 우리 아이에게 장난감도 먼저 꺼내어 나눠주고 사용법도 친절히 알려주는 의젓함을 보였다. 나는 늘 내 아이는 성격이 순하고 어디서나 잘 어울리는 성격이라 여겼는데 이제와 생각해 보면 이는 정말 몇 안 되는 사례만을 두고 판단한 것이었다.


아이가 친구를 알고 어울릴 즈음에 만난 아이들은 대부분 형 또는 누나 그리고 여자 아이 거나 의사소통이 어려운 외국인 친구였다. 노산 엄마를 두다 보니 엄마를 통해 만난 이들은 모두 나이 차이가 나는 형과 누나들이었고(그래서 늘 양보와 배려를 받았고), 그 외에 성별이 달랐기에, 혹은 언어가 통하지 않았기에 어쩌면 또래의 동성 친구와 노는 모습과는 다른 친절함이 좀 더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이겼다! 아니 내가 일등이야. 내가 최고야.’


피자를 굽는 놀이를 하다가도, 변신 로버트 장난감을 갖고 놀다가도 내 아이는 대화 중에 자신이 '최고다' 혹은 '일등'이라는 말이 간간이 들려왔다. 다행히도 동생 부부의 아이는 내 아이의 자화자찬 소리에 크게 반응하지 않고 잘 노는 모습을 보였지만, 나는 또래의 동성 친구와 어울리며 자꾸만 무엇이든 이겼다고 말하는 아이의 말이 불편하게 들렸다. 거실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 아이를 지켜보며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동생 부부와 얼마 전 보았던 영재 아이들에 관한 다큐멘터리 이야기가 꺼냈다. 지금 내 아이의 나이인 만 3세 무렵에 방정식을 이해한 아이에 대해 나는 그저 신기하고 놀라움에 포인트가 되어 이야기했다. 내 이야길 듣던 동생 부부는


“언니, 왜 아이가 그 나이에 그런 수학 공식에 노출이 된 걸까요? 부모가 보여준 걸까요?’


하며 아이답지 못하게 자랄 수 있다는 점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어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쉼 없이 소파에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깔깔대고 정신없이  웃는 아이들을 바라보니 동생 부부가 하는 우려가 무엇인지 느껴졌다. 이런 동생 부부는 내가 언급한 다큐멘터리에 나온 영재 아이에 가깝다. 대한민국에서 의대에 진학했다는 건 그들은 명실공히 최상위권의 학업 성적이었다는 것이고, 더구나 고등학교 역시 과학 고등학교를 졸업하였기에 나는 종종 공부가 제일 쉬웠냐는 부러움이 섞인 농담을 하곤 했다. 그런 그들이 너무 어린 나이에 ‘영재’라는 이름으로 특별하게 살아가는 것에 아이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에 관해선 물음표를 제시하니 나도 그저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대로 마냥 신기하고 부럽게만 볼 일은 아녔구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아이가 자꾸만 자신이 ‘최고’라 말하는 것이 나를 통해 노출된 것만 같아 마음이 심란해졌다. 모처럼 좋아하는 지인과 보낸 즐거움과 함께 '최고'와 '일등'에 집착하는 아이에 대한 걱정을 안고 서울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아이가 다니는 놀이 학교의 지난 알림장도 다시 읽어 보고 하원 시간에 만난 담임 선생님에게 내 걱정을 전했다. 선생님은 그 나이의 아이다움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기질적으로 타고난 승부욕이 있어 수업시간에도  집중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부분이 장점이기도 하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선생님의 이야기에 이해를 하면서도 계속 걱정을 비추니 아이는 성장하고 있고, 아직 말랑말랑한 시기이니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교육을 놀이를 통해 반복적으로 진행하겠다고 하셨다. 선생님과의 상담 후, 걱정이 조금 누그러지긴 했지만, 무엇보다 가정에서 내가 해 왔던 언행에 대해 스스로에게 고해하듯 반성하게 되었다.


자식이 귀하지 않은 부모가 세상 어디에 있으랴마는 걱정이 많았던 노산 엄마인 나는 아이를 갖은 이후 육아 서적을 수능 준비하는 고3처럼 읽어댔다. 그런 내가 읽은 서적들에서 주로 다룬 내용이 아이의 ‘자존감’에 관한 내용을 주를 이루었다. 이를 너무도 단편적으로 적용한 나모지 나는 아이가 잠들기 전에 늘 아이를 꼭 안고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엄마는 ‘우리 이준이 최고로 사랑해. 엄마의 최고야’라는 말을 매일 지금껏 해 왔었다. 밥을 잘 먹어도, 화장실을 잘 가려도 나는 줄곧 ‘우리 아들 최고!’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칭찬에도 기술이 있다는데 어쩌면 나는 이리도 천편일률적으로 마치 아이에게 세뇌시키듯 같은 말을 반복했던 것일까? 아이의 말들은 결국 내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밥을 골고루 잘 먹어 튼튼해지겠다’는 말로도 할 수 있는데 늘 아이에게 해왔던 칭찬이 그저 ‘최고’ 였다는 게, 그리고 그 말을 아이를 통해 다시 들었을 때의 불편한 감정이 뒤섞였다. 어쩌면 나는 아이의 ‘자존감’을 키워준 것이 아니라 지나친 ‘자기애’만을 키워준 것만 같아 후회가 되었다.


제일 친한 친구가 누구냐 물으면 대전에 살고 있는 친구와 더불어 놀이학교 일곱 명의 친구들 이름을 모두 부를 만큼 아이는 친구를 무척 좋아한다. 그리고 다툼 한 번 없이 잘 지내왔다. 그래서 나는 늘 아이의 교우 관계에 문제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관계는 혼자 이루는 것이 아닌 상호 간의 교류이기에 이는 내 아이의 장점이 아닌 운 좋게도 주변 아이들 모두 둥글게 잘 지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아이가 갖고 있는 승부욕이 분명 학습에는 일부 도움이 되기도 한다. 따로 가르치지 않아도 학교에서 배우는 알파벳과 숫자 등을 암기하거나 만들기 수업을 집중해서 끝내고 칭찬받은 것을 자랑스레 말하곤 했다. 엄마인 나는 한편으론 좋으면서도 활자를 빨리 가르치지 않으려는 생각을 갖고 있기에 지켜보는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아이의 행동이 모두 자신이 최고여야 한다 여기는 것에서 발현되었다는 생각이 드니 걱정만 할 것이 아니라 나부터 언행을 바꾸고 또 아이에게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해졌다.


아이에게 잠자리에서 늘 해왔던 ‘사랑하는 우리 아들 최고야’는 ‘사랑한다, 우리 아들, 너무 소중해’로, 밥을 잘 먹는 등의 생활 속 칭찬은 좀 더 구체적으로 ‘야채도 잘 먹어 더 튼튼해지겠다’등으로 바꾸어 갔다. 그리고 아이들 그림책으로 유명한 ‘무지개 물고기(The Rainbow Fish. Marcus Pfister 著)’를 잠자리에서 자주 읽어 주었다.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부분과 내가 아이에게 전하고픈 방향은 조금 다르지만, 이 책을 통해 바닷속에서 최고로 빛나는 무지개 물고기에게 ‘최고’ 보다는 자신이 갖고 있는 특별함도 나누며 친구들과 ‘함께’ 행복한 것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전달하고자 했다. 아이는 놀이 학교 선생님 말씀대로 말랑말랑한 머리와 마음을 갖고 있어 내가 전하고자 하는 것들을 조금씩 배워 나갔다.


'대전 국립과학관'에서 민준이와 이준이

며칠 전 아이가 놀이 학교 수업시간에 장난감 모자를 만들어 왔다. 하원 시간에 자신의 성과물을 자람스럽게 들고 와 엄마에게 자랑하려 달려오는데 평소 같으면 ‘엄마 나 이거 만들었어! 잘했지?’ 했을 아인데 이날은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나 이거 만들었어요. 이거 민준이에게 선물해도 돼요?”

“그럼 해도 돼지”


하고 말하고 아이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이준이가 열심히 만든 건데 민준이에게 선물해도 돼?”  

“네 엄마, 민준이는 이준이에게 최고 소중한 친구여서 줄 거예요.”


그래, 아들. 그놈에 '최고'는 여전히 입에 달고 살지만, 소중한 것도 배웠으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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