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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ko May 15. 2020

‘저녁이 없는 삶’ 이어도 괜찮아.

남편과 저녁식사를 하며 서로의 일정을 공유하는데 내 스케줄을 말없이 듣고 있던 남편이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우리 와이프는 '저녁이 없는 삶'을 살고 있네"


라고 말하였다. 아니 그걸 이제 알았냐고 면박이라도 주려다 이제라도 알게 된 것이 다행이란 생각에 시부모님 덕분에 지난 구정 무렵에 본 심야 영화가 밤공기의 마지막이었다 확인시켜 주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도진 디스크 덕에 한동안 입주 육아 도우미 이모님이 계셨다. 경험 많은 베테랑 전담 양육자가 상주하는 덕분에 출산 후, 수면 부족도 없었고, 비교적 자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어 산후 우울증도 모른 채 지나갔다. 대신 출산과 함께 찾아온 디스크는 10미터만 걸어도 주저앉을 만큼 시큰하게 저린 다리 통증에 일 년 가까이 하루 두 시간씩 걸리는 재활 운동과 물리치료를 다녀야 했으니 아이를 맡아줄 이모님이 없었더라면 안될 일이었다. 지난해 쿠알라룸푸르로 떠나기 전 고마웠던 이모님을 곧 아이가 태어날 집으로 연결해 드리고 난 후부터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의 일과는 아이가 하원 하는 오후 3시 반 전을 전후로 나뉜다.


오늘처럼 외부 미팅이나 오후 일정이 없는 날이면 주차가 편하고 한적한 쇼핑몰로 향한다. 나는 이른 아침의 쇼핑몰을 좋아한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나면 얼추 개장시간이다. 종종 이 시간대의 쇼핑몰 내 단골 카페에서 시원한 버터 스카치 캔디 맛 커피 한 모금 들이키고 나면 아침 내내 아이와 치른 등원 전쟁으로 진이 다 빠진 기력도 말끔히 회복된다. 여기에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 서적을 읽으면 더없이 행복하다. 곧 북적이고 혼잡스러워질 이곳도 이 시간만큼은 주차장도, 카페도 모두 조용하다. 점심시간 무렵부터 마감시간까지 숨 쉴 틈 없이 바쁠 이곳이 일터인 이들도 평온하게 일과를 준비한다. 스팀 소리와 함께 바닥 청소를 능숙히 하는 아주머니, 커피 머신을 꼼꼼히 닦는 초록색 헤어가 잘 어울리는 바리스타, 테이블 위 소스 통을 정리하는 손등 너머 작은 피카추 문신의 햄버거 가게 점원. 한 발 떨어져 바라보는 이에겐 그들이 전날 밤 잠을 못 잤는지, 오늘 아침에 출근하기 싫었는지는 모를 일이나 하루의 시작을 준비하는 모습은 모두 멋지다.


나의 하루는 멋진 것과는 거리가 멀다. 차분한 준비 없이 눈 뜨면 밥 달라는 먹성 좋은 아이의 성화에 강제 기상으로 시작된다. 아침밥을 먹이고, 씻기고, 입힌 후(요즘 배트맨 옷을 좋아해 여기서 로딩이 걸린다.) 아이를 카시트에 밀어 넣고 후크송의 조상신 '나는야 토마토' 동요를 무한 반복하며 놀이 학교에 내려주고 나면, 오후 세시 반까지 한정된 시간이 주어진다. 이 시간 동안 필요한 업무도, 미팅도 모두 몰아서 해치운다. 이 루틴 한 일과에 하루 한 번은 짧게라도 꼭 햇살 받으며 산책을 즐기는 노견과 동네 한 바퀴 걷고 씻기고 돌아서면 하원 시간이다. 아이를 픽업해 오는 길에 함께 한강 공원이나 남산 숲 속 놀이터를 들러 한, 두 시간 놀아주고 집에 와 씻기고 저녁 식사를 마치면 어느새 유일하게 제시간에 챙겨보는 저녁 뉴스 시간이다. 뉴스를 보며 미니 특공대로 빙의 한 아들의 장단을 맞춰 장난감 레이저 총에 맞아 서너 번 쓰러지는 연기를 선보인 후, 잠자리에 누워 동화책 읽다 아이가 잠이 들면 설거지 등의 집안 정리를 마무리하고 나면 자정 무렵이다. 그리고 다음날 또 반복된다. 전업주부 건, 워킹 맘 이건 미취학 아이를 둔 엄마들의 저녁 이후 시간은 대략 비슷할 것이다.

 

법정 근로시간을 52시간으로 단축하는 내용의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통과되며 한국 사회도 '저녁이 있는 삶'으로 급변하였다. 불야성을 이루던 유흥가의 노래방들은 하나 둘 문을 닫더니 이젠 잘 보이지도 않는다. 퇴근 후, 새벽까지 술자리가 이어지던 회식문화는 미투 운동의 확산과 근로기준법 시행 그리고 바이러스의 창궐로 순식간에 종말을 맞이했다. 그 시간의 공백은 자기 개발을 시작한 이들과 가죽, 목공, 악기 등의 여가생활이 메꾸기 시작했다. 남편의 회사도 저녁 회식은 예지녁에 없어졌고, 야근 문화 없는 칼퇴를 원칙으로 하는 데다, 올해는 바이러스로 인해 오전 10시 출근을 시행 중인데, 직원들의 반응도 좋고 덕분에 능률이 올라 선지 업무에도 차질이 없어 정례화시킬 예정이다. 요즘 같아 선 정말이지 직장 생활도 할 만한 분위기로 변화되었다.


그런데 육아는 그렇지 않다. 엄마에겐 주당 52시간 만의 근로시간은 허락되지 않는다. 매일이 풀타임 근무이다. 남편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말이다. 맛집을 찾아다니던 저녁 약속도, 왁자지껄했던 술자리도, 팝콘을 입에 털어 넣으며 보던 심야 영화도 당분간은 어려울 것이다. 여기에 도와주려고 하는 남편이 미덥지 않다. 계란 프라이에 간장을 너무 많이 넣은 것만 같고, 짝이 안 맞는 내복을 입었다고 누가 흉을 보는 것도 아니요 곧 잠이 들 아이 건만 상하 보색 대비로 입힌 것이 거슬린다. 남편에게 다른 건 다 믿고 의지하면서 아이를 돌봄에 있어 선 믿음이 없다. 자주 아이도 맡겨야 남편도 익숙해지고 발전한다는데 머리에선 수긍하고는 마음은 그렇지 못하다. 그렇게 나는 자발적으로 '저녁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저녁이 없는 삶'은 불행만 할까? 흥겹게 부딪치던 소주잔을 아이와 함께 먹는 구슬 아이스크림이 대신하고 맛집 탐방은 배달 서비스가, 영화는 넷플릭스로 대신하니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 자기 개발은 사실상 어렵지만, 아이를 키우며 인내심도 어쩔 수 없이 커지고 있으니 내적 성장을 하고 있다 치고, 아이 덕에 레고 조립을 꽤나 잘하는 뜻밖의 재능을 내 나이 사십 줄에 발견했다. 옹알거리던 아이가 말문이 터지면서 내뱉는 문장들이 신기하고, 때로는 뜨끔하며 하루하루 사용하는 단어가 늘고 건강히 자라는 모습을 보며, 종알종알 놀이학교에서 만난 좋아하는 친구의 이야길 듣고 있노라니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게 자라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는 이 자체가 큰 행복이다. 사람을 만나느라 외모를 꾸미는데 썼던 옷과 화장품 비용을 우리 집 작은 마당에 꽃과 나무를 심는 데 사용하고, 무심코 지나치던 길가의 계류 복원지를 찾아 아이와 노견과 함께 개구리를 찾으러 숲 속 탐험을 떠나고, 그렇게 나는 나만의 저녁을 반납했지만, 신나는 엄마가 된 것은 분명하다.

우리 집 작은 마당과 숲속 탐험 중인 아이들

엄마들도 사람인데 밤공기를 쐬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는가? 요즘 날씨에 야장에서 먹는 술맛을 모르는 바 아니나 전 세계 팬데믹이 선포된 작금의 상황에도 우리나라가 선방을 하고 있는 데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진과 질병관리 본부의 노고는 두말할 것 없고,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전 세계가 모르는 비밀 하나가 있다. 그건 바로 자녀를 위해 저녁이 없는 삶에 익숙했던 한국 엄마들의 모성애와 쑥과 마늘을 먹으며 고난의 과정을 거쳐 여인이 된 집념의 아이콘 웅녀의 후예들 다운 자가격리의 극성맞음에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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