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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희 Nov 09. 2019

잊을 수 없는 엄마의 반찬



 차창으로 내리쬐는 가을 햇살은 따스했고 스치는 바람은 선선했다. 아침 뉴스에서 연휴기간 수십 만대의 차량이 서울을 빠져나갔다더니, 도심의 도로는 곳곳이 한적했다. 뒷자리 쌍둥이 입에 막대사탕을 하나씩 물려줬더니 발을 동동거리며 즐거워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FM 라디오에 주파수를 맞췄다.


 채널에선 추석을 맞아 '명사 초대석'을 꾸리고 있었다.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에서 청년 '경민'역을 맡아 일반에도 친숙한 피아니스트 김정원 씨가 주인공이었다.


 김정원 씨는 만 14세의 나이로 빈 국립음대에 최연소로 수석 입학해 일찍이 신동 소리를 던 피아니스트다. 사회자는 한국 나이 고작 열여섯에 어떻게 부모 곁을 떠나 머나먼 이국땅을 밟을 수 있었는가 물었다. 김정원 씨는 너무나 무모했기에, 무지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답했다.


 자신에게 어린 아들이 한 명 있는데, 열여섯의 아들을 이국으로 보낼 결심을 결코 못 내릴 거 같다고 했다. 부모님의 나이가 되어 당시를 회상해보니 과감하게 결정 내린 어머니가 대단하게 느껴진다고 술회했다. 김정원 씨의 어머니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옛날의 금잔디>, <은실이>, <푸른 안개> 등의 히트작을 쓴 인기 극작가 이금림 씨다.


 김정원 씨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치열하게 글 쓰는 '뒷모습'이라 했다. 한 줄의 대사를 쓰기 위해 끼니도 거른 채 고뇌하어머니. 대사 뒤에 숨겨진 어머니의 번뇌를 알기에 그는 한 단어라도 놓칠세라 드라마를 돌려보고 또 돌려보며 어머니의 노고를 마음에 새겼다 했.


 바빴던 어머니는 빈에도 동행할 없어 공항에서 별을 나눴다. 빈에 도착해 열어본 트렁크 안에는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 싸주신 반찬들이 옹기종기 들어있었다. 멸치볶음, 콩자반, 김치가 든 통에는 어머니의 글씨체로 반찬 름이 하나하나 적혀있었다. 김정원 씨는 어머니의 글씨를 보면서 엉엉 울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김정원 씨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의 스물한 살, 뉴욕 시절이 떠올랐다. 그곳 생활에 조금 익숙해졌을 무렵 그리웠던 건 엄마의 밥이었다. 닭 한 마리 넣어 푹 곤 백숙도, 돼지고기와 감자 넣어 폭폭하게 끓인 김치찌개도, 너무 딱딱하게 졸여졌다며 타박하던 쇠고기 장조림마저 사무치게 생각났다.


 그리움이 미치도록 가슴에 스며들 때면 34번가 한인마켓에서 25불 주고 산 전기포트에 닭다리와 마늘, 양파를 넣어 끓여먹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을 들여 닭을 끓여도 엄마를 향한 그리움은 달래지지 않았다.


 미국에 있는 동안 엄마는 가끔 소포를 보내주셨다. 그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밑반찬들이 옹기종기 담겨있었다. 이역만리로 그것들을 보내면서 엄마는 설레었을까, 행복했을까, 아니면 애달팠을까.


 겹겹의 포장지를 벗겨냈더니 메모지에 반듯한 엄마의 필체가 들어있었다.

꽈리고추 멸치볶음: 고추가 조금 매울 수도 있음
약고추장: 계란 프라이 곁들여 먹으면 좋음
김자반: 냉동보관이 좋으나 냉장 보관해도 됨


 익숙하고 정겨운 엄마의 글씨를 보니 눈물이 왈칵 솟았다. 울음을 꿀꺽 삼키고 멸치볶음을 손으로 집어 입에 넣어봤다. 눈을 감고도 알 수 있는 '엄마의 맛'이었다. 그 맛이 가슴속에 사무쳐 삼켰던 눈물을 토해내 꺼이꺼이 울고 말았다.


 그때의 일이 아직까지도 머릿속에 선명한 영상으로 남아있는 걸 보면 이국에서 먹었던 엄마 밥이 그렇게나 좋았던 모양이다. 가끔 도착하는 엄마의 반찬으로 향수를 달래며 그곳에서의 삶에 하루하루 적응해 나갈 수 있었다.


 십수 년이 흘러 나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엄마 밥에 대한 향수는 나이가 들수록 옅어지긴녕 짙어져만 간다. 내 손으로 요리를 하여 아이들을 먹이고 있는 지금도 엄마 밥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하다. 레시피 없이 대충 넣고 끓이다가, 중간에 맛보고 짜면 물을 더 넣고 싱거우면 소금을 더 쳐서 완성하는 엄마 요리법. 그럼에도 언제나 한결같은 엄마표 음식, 엄마의 맛.


 엄마가 건강히 오래오래 내 곁에 계셔주셨으면 좋겠다. 그 이유가 엄마 밥을 오래 먹고 싶다는 식욕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그건 엄마 뱃속에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사랑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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