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참는 법
어릴 적 숨 오래 참기를 해본 적이 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는 것 그리고 참는 것, 그게 다다. 어린아이의 패기였을까 단순한 승부욕이었을까. 오랫동안 숨을 참는다. 숨을 들이쉬면 폐 속 가득히 공기가 들어온다. 꽤 오랫동안 숨을 참고 뱉으면 참은 만큼 헉헉 대는 소리와 함께 날숨이 한꺼번에 새어 나왔다.
락앤락 통이 포물선을 빠르게 그리며 떨어졌다. 시끄러운 언성이 오고 갔다. 목소리는 벽을 타고 왔다 갔다 드리블을 하듯 점점 더 넓은 간격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밤늦게 이 시간에 친구가 나오라고 한다고? 말이 되니"
"답답해서 나간다고!"
나는 아빠보다 한 템포 더 빠르게 큰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외출 문제로 싸운 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외출하면 바로 집, 집, 집에 가야 되는 회귀본능이 발동했다. 그건 만들어진 본능이었다. 막상 멀리 외출을 하고 친구들을 만나면 그 순간만큼은 제일 신나게 논다고 자부하는 나였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외출을 하면 시간을 재기 시작했다. 마치 각을 재기라도 한 듯이 친구와 놀던 와중에 "집에 가야 돼"라고 하면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집에 꿀이라도 발라놨어? 좀 더 있다가"
친구들은 내 상황을 알지 못했다.
아빠가 부엌 쪽으로 락앤락 통을 던지자 와장창 소리가 났다. 통이 부서졌다. 깨진 조각을 보고 있으니 나는 흥분해 윽박을 질렀다. 거실에서 눈치를 보던 반려견이 내 방으로 들어갔다.
서로 언성이 높아지다가 아빠가 울먹였다. 본인도 답답한 마음에 풀 때가 없다, 답답해서 그런단다.
엄마의 부재 이후 아빠와 내가 진지하게 대화를 한적은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화풀이로 물건을 던지다니. 내가 말대답을 해서 화났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 않나.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한동안 아빠를 본 채 만 채 지냈다. 그럴수록 아빠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사 온다던지 편지를 쓰며 내 마음을 달래려고 애썼다. 그러면서 하는 말은 항상 비슷했다. 엄마도 없는데 혈육이라곤 너 하난데 우리 오순도순 살아가야 되지 않겠느냐는 내용. 진절 머리가 났다.
나도 숨 쉴 구멍이 필요했다. 그중에 하나가 가까이 사는 친구 차를 타고 서울이나 경기도 근교를 돌아보거나 조용히 밤에 산책을 하는 것이었다. 혼자 보내는 시간은 꼭 말하고 가야 하는 것도 동의, 허락을 받아야 된다는 기분이 들어서 살짝 불편했었으니까.
결국 우리는 겨우겨우 참고 쌓아왔던 걸 서로가 터트린 셈이다.
아빠는 눈물이 많아졌다. 눈물이 많아진 만큼 걱정도 커졌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일주일 정도 냉전을 하고 일상적인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아빠와 내가 번갈아 가며 강아지의 약과 사료를 챙겨줘야 했기에. 주로 강아지에 대한 이야기가 전부였다.
아빠는 저녁이 되면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고모들에게 전화를 줄곧 하기 시작했다. 내가 듣지 못하게 몰래 전화를 한다는 것을 나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게 아빠의 유일한 숨 쉴 공간이기 때문이다. 나도 내 나름대로 음악을 듣거나 공원으로 산책을 나간다. 우리는 서로 철저하게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서로의 슬픔을 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