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즈유 Apr 07. 2022

기교는 진정성을 이길 수 없다

글쓰기의 본질 

꽤 오래전 일이다. 고등학교 친구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가셨는데, 아버지를 마지막까지 배웅한 후 친구가 조문을 한 사람들에게 감사의 편지를 문자로 보냈다. 고인의 마지막을 함께 한 조문객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어서 그 자체가 새롭지는 않았지만 친구의 편지를 읽고 마음속에서 ‘쿵’ 소리를 들었다. 

전에 받았던 감사 편지는 형식적으로 쓴 것들이 많았다. 내용도 비슷했는데, 어쩌면 감사 편지를 쓸 때 그렇게 써야 예를 갖춘다고 생각해서 일정한 형식에 내용을 맞춘 것 같기도 하다. 친구의 편지는 시작부터 달랐다. 혹시라도 그때 친구가 보냈던 문자가 남아 있는지 문자와 카톡을 다 뒤졌는데, 안타깝게도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대략 내용을 기억해보면 ‘아버지는 원래 오페라를 들으며 음악을 하기를 꿈꾸셨는데,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느라 꿈을 접어두어야 했다. 아버지 유품을 정리하다 오래전 아버지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오페라 티켓을 보고 한 동안 꺼이꺼이 울었다’는 내용이었다. 줄거리 중심으로 쓰다 보니 당시 친구의 글에서 내가 느꼈던 감동은 없고, 사실만 건조하게 나열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든다. 

친구의 편지를 보면서 ‘얘가 원래 글을 이렇게 잘 썼었나?’ 의아했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 때 전교 1등을 도맡아 했다. 전교 1등 답게 서울대학교에 진학하고 졸업과 동시에 리서치 회사에 취직해 지금까지 리서치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똑똑하고 능력 있는 것은 진즉에 알았지만 글까지 잘 쓰리라곤 짐작도 하지 못했다.      

물론 기본적인 글쓰기는 가능했을 것이다. 리서치 회사는 거래처의 의뢰를 받아 조사한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글로 정리해 보고하는 일을 하니, 기본적인 글쓰기 능력이 요구되는 분야다. 또한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일상처럼 글을 쓰면서 늘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본적인 글쓰기만으로는 감동을 주기 어렵다. 내가 친구의 글을 보고 울컥 한 이유는 아버지를 향한 친구의 절절한 마음이 읽혔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유난히 아버지를 좋아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엄마보다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더없이 돈독했다. 아버지가 말기암 진단을 받고 남은 시간이 6개월밖에 안 된다는 얘기를 듣고 매주 금요일마다 지방에 계시는 아버지를 찾아 주말을 보내고 일요일 서울에 올라왔다. 친구의 지극 정성 때문이었는지 6개월밖에 못 사신다는 아버지는 1년 반을 사셨고 가족들의 품에서 생을 마감하셨다. 

그 친구를 잘 아는 다른 친구는 말했었다. 그 친구에게 아버지는 목숨이었다고. 그런 아버지와의 이별은 한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을 것이고, 그 감정을 솔직하게 글로 썼기에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의례적인 감사 편지가 아닌, 진정성이 담긴 그 친구의 글을 보고 나도 모르게 다짐했었던 모양이다. 언젠가 나도 감사 편지를 써야 할 때 상투적인 문구 대신 내 마음을 전하겠다고. 이후 아버지가 2015년에, 어머니가 5년 뒤인 2019년에 돌아가셨을 때 나도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부모님을 추모하며 감사의 글을 썼다.      


2015년 7월 6일 -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한 달 전부터 아버지와 이별을 준비했습니다. 4년 전 병을 얻고 점점 괴팍해지는 아버지를 보면서 아버지가 어떤 분이었는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아버지가 50여 년 이상 몸 담았던 교직을 떠나며 쓰신 자서전을 발견하고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얼마나 치열하게 산 분인지, 교직을 천직으로 알고 얼마나 최선을 다해 사셨던 분인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매일 아버지의 위태로운 하루하루를 함께하면서 마음이 불안할 때마다 아버지 책을 필사하곤 했는데,  마치 제가 필사를 다 마치기를 기다린 것처럼 필사가 끝난 후 채 2일이 지나기 전에 하늘나라로 여행을 가셨습니다. 

아버지와 마지막 이별하는 내내 날씨가 무척 좋았으니 분명 좋은 곳에 도착하셨을 것이라 믿습니다.

한 달에 걸쳐 충분히 작별인사를 했다고 생각하지만 이 한 마디를 쑥스러워 큰소리로 못한 게 걸립니다. 지금이라도 해보고 싶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아버지 가는 길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아버지 편안하고 행복하게 가셨습니다.           


2019년 7월 11일 (내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엄마 천국으로 잘 보내드렸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 혼자 남은 엄마가 쓸쓸할까 봐 ‘매일 전화하기’, ‘2주일에 한번 찾아뵙기’라는 나와의 약속을 하고 가능한 한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분명 엄마를 위해 시작한 일이었는데, 올해 초 엄마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돌아가시기 한 달 전부터는 전화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셨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엄마랑 매일 통화하면서 그동안 내가 얼마나 위안을 받고 행복했었는지를....     

엄마의 임종은 지켰습니다. 하지만 심장만 뛸 뿐, 의식도 없고, 몸도 차가운 엄마를 보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종이 한 장처럼 느껴졌습니다.      

엄마의 부재를 실감하지 못한 상태에서 장례미사를 드렸는데, 신부님의 말씀이 귀에 꽂혔습니다.      

"죽음은 삶의 마지막이 아니라 삶에게 의미를 주는 것"     

천주교를 믿지 않는데도 그 말이 많은 위안이 되었습니다. 엄마의 죽음 앞에서 허망함과 당혹감 사이에서 방황하던 나로서는 죽음이 있기에 삶이 의미가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엄마는 정말 열심히 그리고 당당하게 살다 가셨습니다. 돌아가시기 2주 전에 유언처럼 "이만하면 나는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서러워할 것 없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마 그때 엄마는 죽음을 예감하셨던 것 같습니다.      

나도 엄마만큼만 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중에 엄마를 만났을 때 엄마 딸답게 한 세상 잘, 원 없이 살고 왔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절절하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는 글은 저절로 써진다. 비록 문장이 좀 어색하고 맞춤법이 틀릴 수는 있지만 큰 문제는 아니다. 마음이 아플 때는 더욱더 글의 기교 따위는 필요 없다. 속에 꽉 차 있는 무언가를 솔직하게 글로 쓰면 된다. 진정성을 글에 담으면 설령 문법적으로 오류가 있어도 글이 애초에 말하고자 한 진정성을 훼손하지는 않는다. 

이전 12화 메모가 쌓이면 히스토리가 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