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하는 습관, 나를 이해하는 단서
사람의 기억은 불확실하다. 기억을 붙잡아 둘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메모’가 아닐까 싶다. 시아버님이 자신의 인생을 정리한 원고를 읽으면서 솔직히 좀 놀랬다. 90여 년 가까운 세월을 다 기억하기란 불가능하다. 시아버님 당신도 원고를 다 쓴 후 ‘근 90년간 겪어온 세월을 더듬어 간추려보고자 노력하였으나 기억력에 한계가 있어 죽을 때까지 잊히지 않을 사안도 있겠으나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안도 잊힌 것이 적지 않은 것 같다’로 서두를 시작하셨다.
실제로 탄생부터 6.25 전쟁을 겪을 때까지의 이야기는 두루뭉술하게 진행된다. 하지만 직업 군인이 된 후부터는 구체적인 날짜를 언급하며 풀어낸 이야기들이 많다. 예를 들면 ‘1954년 3월 13일 전남 광주에 있는 상무대 육군포병학교에서 소정의 훈련을 마치고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와 같은 식이다.
나중에 비밀이 밝혀졌다. 시아버님과 무슨 이야기를 하다 우연히 아버님이 어떤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날에는 메모를 해두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 시아버님의 메모 노트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메모를 시작한 지는 최소 수십 년 이상 될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정확하게 년도월일까지 언급하며 글을 쓸 수 있었던 것 같다.
얼핏 아버님 메모 노트를 본 적이 있는 남편도 시아버님의 세밀함에 감탄했다. ‘아내가 자다가 장롱을 뒤짐’이란 메모가 적힌 날이 있었는데, 그 날이 아마도 어머니가 이상 행동을 시작한 첫날이었을 것이다. 단순히 집안 대소사만 간단하게 적은 것이라 아니라 평소와 다른 이벤트가 있는 날에는 어김없이 메모를 남기셨다.
“나중에 내가 죽으면 노트를 너한테 물려줄 테니 이어서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적어라”
아버님은 최근 남편에게 메모의 임무를 부여했다. 수십 년 동안 메모를 해보니 그 자체가 아버님의 역사이자 강씨 집안의 역사라 말씀하셨다. 아버님이 세상을 떠난 후 남편이 이어받아 메모를 계속 하면 강씨 집안의 역사가 이어지는 것이라며 메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얼마 전 서랍정리를 하다 낡은 노트 한 권을 발견했다. 딱 봐도 족히 십여 년은 된 듯한 비주얼이었는데, 열어보니 20대 중반 신입기자로 일할 때 썼던 글이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회사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다. 기성세대의 위선을 못 견디는 햇병아리 기자의 분노가 가득했는데, 슬쩍 웃음이 나왔다. 그때는 분명 가슴 속에 차오른 불만과 분노를 글로라도 풀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썼을 텐데, 50대 중반이 된 지금의 내가 보기에는 치기어린 불평불만 수준이었다. 그래도 젊은 시절의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소중하게 다가왔다.
매일 일기를 쓰면서 자신을 마주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어쩌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글을 쓴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메모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하루에 1분만 시간을 내도 그날의 중요 이벤트는 충분히 적을 수 있다. 이벤트 외에 그날의 감정과 스스로를 위로하는 문구 정도를 더 쓰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현재의 나도 중요하지만 과거의 나도 중요하다. 과거의 나를 이해해야 현재의 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그때 남긴 메모는 과거의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자신만의 히스토리를 만들 수 있는 메모를 시작해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