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를 읽고
쇼펜하우어에게 인생은 고통이고 맹목적 의지를 따르는 표상에 불과하다.
그는 인간이 다양한 현실의 고통에 매몰되어 있고 그것이 허상임을 직시함으로써 사람들을 마법에서 풀려나게 한다
그러나 의지라는 무신론적 해석과 고통의 의미에 대한 무관심은 쇼펜하우어 사상의 한계로 작용하고 거기서 더 샛길로 빠지게 되는 실존철학 탄생에 기여한다.
따라서 그의 생각을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다 기울어진 쪽에 무게 추를 더하는 것과 같으니 말이다
아쉽게도 이 책은 이 우려를 현실화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여전히 실존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굳이 쇼펜하우어를 다룬다면 이 책뿐 아니라 쇼펜하우어 책들이 공통적인 문제를 안게 될 것이다
쇼펜하우어에게 완벽을 기대할 이유는 없다 그 역시 치열하게 인생을 살아낸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한계가 그의 지식에 그대로 투영되었을 것이다
다만, 그의 한계를 알아볼 수만 있다면 치명적인 독은 곧 약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책이 만드는 파도에 온몸을 맡기게 되면 쇼펜하우어 자신도 경계했던 잘못된 독서가 되는 것이다
지금부터 그 독소가 무엇인지 알아본다
내용은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전체적인 흐름과 문제점은 이렇다
1장 마흔, 왜 인생이 괴로운가
불행해서 괴롭고 고통스러워서 괴로운 인생, 책은 고통과 권태를 오가는 인간의 고뇌, 그 본질은 허상임을 말한다
☞ 쇼펜하우어는 산다는 것은 괴로운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그 고통은 화재 경보음임을 간과한다 불난 게 문제인가 경보가 울려서 시끄러운 게 문제인가. 인생에서 고통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가장 강력한 문제의식이며 삶의 실마리라는 것을 간과한 점이 아쉽다. 의지의 세계를 맹목적이라고 설정함으로써 표상이 주어진 이유를 사유하지 않고 허상이라는 착각에만 집착해서는 고통이라는 에너지를 제대로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2장 왜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하는가
책은 그 고통을 견뎌내기 위한 출발점이 자기 자신임을 말한다
행복이란 주관적인 것이며, 자신의 개성과 소질에 맞도록 노력함으로써 다다를 수 있는 만족감이다. 자기만이 할 수 있고 자기에만 즐거운 것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 그러나 책은 고통이 주어진 이유를 사유하지 않기 때문에 고통은 해소되지 않는다 화재 경보음이 울리면 빨리 불을 찾아서 꺼야 한다 경보음을 외면하고 자신 안으로 더욱 침잠하는 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3장 무엇으로 내면을 채워야 하는가
책은 생각의 힘을 강조한다
가장 행복한 삶은 철학자의 삶이라고 한다
☞ 행복의 출발점은 자신의 개성과 소질에 맞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했던 것과 달리, 철학자의 삶이 가장 행복하다는 절대적 기준을 내걸거나 사람의 수준을 3단계로 나누는 것은 자기모순이 아닌가 한다. 그래도 행복의 솔루션을 개성의 다양한 실현이 아닌 사유 하나에서 찾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겠다. 본질에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인간은 얼마든지 더 모순적이어도 된다
인간에게 행복을 주는 것은 일이 아니라 올바른 생각이다. 철학자라고 하여 다 올바른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며 다른 일을 한다고 하여 올바른 생각을 못 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생각은 언제 어디서나 그 방법만 알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올바른 생각법을 아는 것 그것이 진정한 행복의 출발점이다
4장 어떤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가
책은 우리가 중요시하는 남녀 사랑과 인간관계의 허상을 지적하며 혼자서도 행복한 법과 이웃에 대한 연민을 말한다
☞ 인간이 초월적인 고유 역량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는 남녀 관계와 복잡한 인간관계를 언젠가는 뛰어넘어야 한다. 그 시기가 중년 이후인 것도 맞다. 따라서 그 본질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다만 다른 고통과 마찬가지로 관계가 주는 고통을 그냥 외면하고 무시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그 고통을 시작으로 스스로의 문제를 찾고 풀어 나갈 때 비로소 인간은 성장하는 것이므로..
예를 들어, 누군가 산 정상에서 ‘여기가 산 정상이야’라고 알려준다고 하여 내가 그 정상에 설 수 있는 게 아닌 것처럼 진리는 텍스트로 아는 것이 아니다. '아 저 꼭대기에 정상이 있구나' 하고 참고할 뿐 그 외침이 내 앞의 장애물을 치워주지는 못한다. 결국 스스로 헤쳐 가는 생각법을 모르고는 정상으로 향할 수 없다
5장 어디에서 행복을 찾아야 하는가
책은 현재와 각자의 개성에 충실한 삶을 강조한다
역시 실존적 해답이 독자에게 주어진다
☞ 실존철학이 주는 메시지는 얼핏 들으며 참 따뜻하고 마음에 와닿는다. 그러나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치명적인 독이 아닐 수 없다. 실존은 각자의 욕망에 무한한 권한을 주고 각자가 원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말하며 오직 현재에 집중하라고 한다. 종적 특성이나 인생의 의미와 같은 절대적 과제는 구 시대의 오류로 취급한다
그러나 현재가 과연 존재하는가? 작은 행복이란 것이 위대한 인생의 의미가 될 수 있는가? 자신의 개성이 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현재를 포착할 수 없다 그런데도 현재를 강조하는 것이야말로 잘못된 실존철학 사조가 만들어낸 허상이다
시간은 항상과 무상 두 가지만 존재한다 우리는 무상의 세계에 실존하는 것이며 그 변화의 굴레에 현재라는 영역은 없다
따라서 있지도 않은 현재에 집중한다는 것을 잘못 해석하게 되면 생각의 폭을 좁히며 불나방 같은 본능과 욕망만을 따르게 할 수 있다
또한 작은 행복은 순간의 기쁨을 주지만 인간이 추구할 진정한 행복과는 무관하다. 그런 소확행에 중독된다면 인간다운 치열한 생각의 기회를 영원히 잃을 위험이 있다
인간은 어떤 종보다도 종적 특성이 강한 존재이다
우수한 두뇌가 그저 우연히 주어졌을까 아니면 뭔가 더 큰 역할이 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인가.
소확행이 인생의 의미라면 굳이 이렇게 정교한 두뇌가 필요할까.
과학이 모른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과학 이전부터 인간의 존재 이유가 있음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인간에게는 다른 어떤 종보다 강력한 종적 특성이 있다
그것을 무시하는 게 실존 철학이기 때문에 개인의 소확행도 중요하지만 그것에만 갇히는 것은 위험하다
인간의 종에 주어진 생각 법과 인생 법, 그것이 종적 특성이다
인간은 그것을 하는 게 먼저이고 각자의 환경에 따른 개성은 그 뒤이다. 개성이 주는 만족과 인간 고유 역량이 주는 행복은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자신의 고유 역량을 통해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설계된다 그것을 외면하고 다른 데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해 봐야 헛수고이다
예를 들어, 벌이 꽃을 찾아가야지 돌멩이를 쫓아봐야 꿀을 얻을 수 없는 이치이다 돌멩이가 앉아서 쉬기 편하다고 외쳐봐야 꿀에 대한 허기는 채울 수 없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 이런 실존적 솔루션이 나오는 이유는 쇼펜하우어가 이 세계를 움직이는 하나의 의지를 맹목적이라고 보고 거기서 오는 고통을 허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 의지와 표상이 추구하는 바를 사유하지 않고 그것의 무의미함에 천착한 것이 실존철학의 빌미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소극적 행복론에 그칠 수밖에 없다 요즘 유행하는 소확행이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쇼펜하우어를 쫓아봐야 꿀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이 책에서 소개하는 쇼펜하우어의 생각 중에는 아주 중요한 얘기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책에서 쇼펜하우어는 자기 인식을 통한 후천적 성격을 얻기 위해 적절한 교육이 필요하지만, 많은 지식이 인간을 쓸모없고 둔하게 만든다고 했다
물론 저자는 이 말을 자신에게 적합한 지식을 찾아야 한다고 해석하고 있지만, 이는 어떤 지식이냐가 아니라 지식을 소화하는 학습법 자체를 문제 삼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적성과 진로에 급급하여 지식을 소화하지 못한 채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탐구력으로 올바른 학습법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밝혔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다음으로, 쇼펜하우어가 강조한 독서법이다
우선 책 선택법으로, 고전을 권하면서 악서를 피하라고 한다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가 쓴 글, 사물 자체에 대한 생각을 다룬 극소수의 책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대중은 돈을 벌기 위해 쓴 책 악서를 읽는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타당한 견해이나 문제는 대부분의 작가가 악서를 의도하는 게 아니어서 모두가 양서의 탈을 쓰고 있으므로 독자는 책을 선택하기 어렵다. 보다 구체적인 선별 기준이 필요하다
또한, 쇼펜하우어는 독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위험을 경계한다
“독서란 자기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대신 생각해 주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사유 없는 다독을 경계한다.
남의 책을 지나치게 많이 읽는 것은 나의 정신을 마비시키는 독과 같다고 강조한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생각을 영글게 하는 건 다독이 아니라 숙독이며 오랜 세월 사색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요즘 하루 한 권 책 읽기 챌린지라든가 아이에게 다독을 강요하는 세태를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아직 소화 회로 가 없는 어린아이들이 다독을 하면 더 위험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학습법을 알지 못하면 차라리 지식을 멀리하는 게 더 이롭다
인간의 고통은 경보음이다.
고통을 다루는 것이 너무도 힘든 우리에게 그 경보음을 외면하는 방법만 차고 넘친다
그 경보음을 무시할 것이냐 아니면 적극적으로 대처할 것이냐 그 선택에 따라 인생의 의미는 달라진다
이 책은 쇼펜하우어라는 태생적 한계에서 출발하여 더 깊게 실존적 해법을 모색하고 있다
그런 독소를 잘 이해하고 책을 읽는다면 오히려 그 이면의 진리에 다가갈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