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페 디엠(Carpe Diem)'
내 수업을 듣는 학생 준호의 노트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자주 외치던 말이다.
"이거 왜 적어놨어?"
"'현재를 살아라', 멋있잖아요."
고대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의 시에서 유래하여 원문은
“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
“오늘을 붙잡아라, 내일에 너무 의지하지 말라”이다.
시인은 과도한 욕망을 내려놓고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현재로 욕망의 범위를 축소하려던 것이다. 떨어지는 행운이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으로 만들어 가는 가치를 강조하고자 했다.
‘현재에 집중하라’
‘현재를 즐겨라’
현대에도 여전히 카르페디엠을 외친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언어적 계승일 뿐 의미는 정반대로 바뀌었다는 것을 아는가.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지금, 여기’를 중시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노력은 항상 존재했다. 실존철학이 지배하는 현대에 와서는 요가, 명상, 뉴에이지 운동, 마음 챙김(Mindfulness) 등으로 현재로의 수렴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다만, 과거와 다른 점은 그 목적이 욕망의 제한이 아니라 생각의 제한으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호라티우스의 ‘현재’가 인간을 성장시킨다면, 실존의 ‘현재’는 인간을 타락시킨다. 목적의 차이가 만든 결과의 차이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둘을 섞어 버린다. 진실과 거짓이 섞이는 것, 사이비가 탄생하는 방식이다.
“고통은 에고가 만드는 과거와 미래에 대한 생각에서 온다”
“에고의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라”
“현재에 집중하고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을 제거하면 에고와 생각은 제거된다”
“현재를 통해 에고에서 깨어나면 현존의 의식이 나의 형상을 통해 들어오고 난 영감과 열정(enthusiasm)의 상태가 된다. 이 상태는 지성은 존재하나 의식은 자기 자신에 대해 무의식이 된다 단순히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 창조적 힘이 주어진다.”
유명한 신비주의 명상가 에크하르트 톨레가 한 말이다. 그는 현재에만 집중하고 생각을 제거할 때 인간은 훨씬 위대한 존재가 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생각을 현재에 고정하고 얻는 희열이 현대인의 성장 비법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지는 이미 오래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현재’라는 개념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시간적 개념이라기보다는 흐름 그 자체에 가깝다. 따라서, ‘현재’를 의식하게 되면 중심을 잡는 게 아니라 오히려 흐름에 휩쓸려 간다.
현재에 머무는 대신 자기 통제력을 잃고 시대나 감정, 상황의 흐름에 종속되어 버리기 일쑤다.
자유롭게 시공을 초월하던 인간의 생각이 현재를 쫓느라 조금의 여유도 가질 수 없는 과부하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과 에고가 끼어들 틈이 없는 것이지 제거되는 건 아니다.
러너스 하이(Runner’s High)처럼 경계가 사라진 어떤 특이한 경험을 하는 것은 결코 깨달음이 아니다.
그런 희열을 기대하며 현재에 집중한다면 이는 더 과잉되고 왜곡된 자의식을 초래할 것이다. 환상을 깨달음으로 착각하면서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는 현상이다.
"현재를 살라는 말라는 말이 왜 멋있어?"
"잡생각 안 하니까요."
준호의 설명은 명쾌했다. 진짜 의미를 꽤 정확히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현재에의 집중은 생각을 멈추게 한다.
문제는 좋은 생각, 나쁜 생각 가릴 것 없이 다 제거된다는 데 있다.
자의식과 고통이 나를 괴롭힌다고 해서 생각 자체를 제거해야 한다는 발상은 극단적이고 비정상적이다. 몸이 병들고 아프면 몸을 없애자고 할 판이니 말이다.
불교 철학에 의하면, 에고나 생각이 없는 상태가 해탈의 경지인 것은 맞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그 최종 ‘상태’가 아니라 과정에서 얻은 ‘성장’ 임을 기억하자.
예를 들어, 인간은 결국 누구나 죽는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죽으나 나중에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살면서 이루어 내는 것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집착과 고통을 유발하는 에고와 생각.
그것은 우리를 한 단계 성장하도록 돕는 소중한 사다리이다.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는 현재의 충만감은 그 사다리를 다 오르면 만날 수 있다.
사다리는 그때 버리면 된다.
섣불리 스스로 에고를 버린 인간은 빈껍데기로 전락한다. 소프트웨어가 삭제된 더미 터미널처럼, 주인 없는 집은 온갖 악성코드의 놀이터가 되기 십상이다.
정해진 바를 다 공부하지 않고 하루아침에 졸업할 방법은 없다.
모든 과정을 건너뛰고 성장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의 모든 것이 성장에 총동원된다.
자의식, 욕망, 과거에 대한 생각, 거기서 나온 고통까지, 뭐 하나 버릴 것 없이 죄다 필요하다. 싫다고 함부로 잘라내고 외면하면 질문력의 유기성이 파괴된다.
‘난 오늘만 살아’
뭔가 심오해 보이지만 텅 빈 이런 말, 요즘 종종 듣게 된다. 아마 준호도 이대로 어른이 되면 이런 말을 할 법하다.
‘현재’라는 사상을 비판 없이 수용한 사람들은 깊게 고민하지 않고 길게 생각하지 않는 걸 자랑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문제의식을 애써 외면하고 마비시킨다. 자신도 모르게 질문력과 멀어지는 길을 택하는 것이다. 대신 온전히 지금 이 순간 자신의 감각에 집중하는 것을 더 가치 있다고 여긴다.
인간은 현재의 흐름에 질문하고 거기서 벗어나도록 설계된 유일한 존재다.
여기에 인간의 위대함이 있다.
현재의 흐름이란 욕망과 감각이 주도하는 인과율이다.
주어지는 대로 순응하고 흘러가는 것, 멋있어 보이지만 실상은 동물적 삶이다.
거기서 벗어날 수 있음에도 굳이 종속되고자 한다면 인간이길 포기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인생은 원래 허무한 거야’
질문하지 않는 인간에게는 찾아오는 깨달음은 이것뿐이다.
다행히도, 질문력의 도둑은 당신이 ‘현재’라 믿는 그곳에만 산다.
잠시의 멈춤이라면 괜찮다.
낮잠처럼, 성장의 흐름 속에 스쳐가는 휴식이라면 얼마든지 현재를 거닐어도 좋다.
그러나 그 시간이 너무 길다면 질문력은 안전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