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공평하게 흐른다는 말은 틀렸다. 어떤 시간은 점성이 강해 발목을 붙잡고, 어떤 시간은 물처럼 가벼워 손가락 사이로 허무하게 흘러간다. 뒤돌아보면, ‘어른’이라는 직함은 노력해서 얻은 전유물이 아니라, 계절이 바뀔 때 담벼락에 맺히는 서리처럼 어느 날 갑자기 내 삶에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어린 시절의 나는 왜 그리도 서둘러 그 서리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었을까? 구슬이 부딪히는 맑은 소리나 딱지가 바닥에 닿는 둔탁한 소리 속에 머물 수도 있었을 텐데... 아이들의 세계는 그 자체로 완전한 우주였음에도, 나는 자꾸만 그 우주의 가장자리를 맴돌며 어른이라는 미지의 행성에서 들려오는 신호를 받으려 애썼다.
어머니의 손에 핸드백이 쥐어진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엄마의 손은 늘 젖어있거나 고목나무처럼 갈라지고 거친 손이었고, 흙이 묻어 있거나, 누군가의 마른 등을 쓰다듬느라 비어 있었다. ‘형편’이라는 단어는 어린 내게 ‘없음’의 감각을 먼저 가르쳐 주었다.
어머니의 빈 손보다 아버지의 지갑이 늘 비정상적으로 두툼했던 기억이 난다. 그 두툼함은 권위였을까, 아니면 가장이라는 이름의 무거운 고통이었을까?
손재주가 좋았던 언니는 그 ‘결핍’의 틈을 종이로 메우기 시작했다. 언니가 가져온 것은 이미 지난 달력 종이였다. 지나간 날짜들이 인쇄된 빳빳한 마분지처럼. 언니의 가위질 몇 번에 숫자들이 잘려 나가고, 날짜의 조각들이 모여 작은 손지갑이 되었다.
가방은 점점 커졌고, 마침내 어깨에 멜 수 있는 끈까지 생겼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종이가 아니라 우리가 갈망하던 ‘어른의 품위’ 그 자체가 되었다.
나는 그 가방을 채울 허기를 지폐로 만들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달력을 찢고, 누군가의 지식이 가득 담긴 두툼한 책장을 오려냈다. 그것들은 잉크 냄새조차 나지 않는 무색의 화폐였지만, 내 손끝에는 세상의 모든 가치가 만져지는 듯했다.
우리는 그 종이 조각들로 인생을 사고팔았다. 아무것도 살 수 없는 돈을 주고받으며 우리는 무엇을 그토록 소유하고 싶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물건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다는 오만한 자유였을 것이다.
진흙 속에 구운 동그랑땡의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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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기다리며 글을 씁니다. 멈춘듯, 흐르지 않는 어둠과 함께 ... 시간에 대한 후회, 반복되는 상처로 인해 글은 저의 치료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