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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elboso Mar 19. 2021

[플랜트 산업 쉽게 접근하기] 소소한 플랜트 이야기

아주 소소하고 별거 아닌 잡다한 이야기

작년 8월부터 지금까지 10개의 시리즈, 33편의 글을 올리면서, ‘제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궁금해하실 내용’을 고민해서 소재를 찾았습니다. 제가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도 아니고, 여러 모로 부족하기 때문이겠지만, 주제를 정해서 몇 편을 이어갈 수 있을 만한 소재가 똑 떨어졌습니다. 며칠을 고민했는데도 적절한 주제가 떠오르지 않아, 오늘은 주제를 가진 무게감 있는 이야기가 아닌 가벼운 이야기를 전해 드리려고 합니다.


경험 위주의 아주 소소한, 알아도 쓸 데 없는 이야기를 전해 드리려고 하는데, 별거 아닌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전하려면 제가 경험한 배경을 먼저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비철제련 플랜트의 공정설계 엔지니어로 일을 시작했고, 첫 직장에서는 설계 외에도 현장에서 직접 조업도 해보고 경제성 검토(Feasibility study) 업무도 담당했습니다. 플랜트 산업의 핵심인 oil & gas로 넘어가기 위해 엔지니어 이름표를 떼고 전직한 두 번째 회사에서는, 견적 업무부터 시작해서 프로젝트 관리도 해보고, 기술영업하다가, 마지막에는 BD(Business Development)로 퇴사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한 우물을 깊게 판 장인이 아니라, 얕고 (다른 분들과 비교했을 때) 넓게 다양한 업무를 경험한 장돌뱅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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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가장 오지에 위치한 플랜트


첫 직장에서 ‘엔지니어는 현장을 알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약 1년 간 당시 확장공사를 진행 중이던 제련소에서 각 공정을 돌며 조업을 경험했는데, 현장의 위치가 경상북도 봉화군 석포면 석포리입니다. 지명이 생소한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당연합니다. 영주역으로 가는 기차가 하루에 한 번 운행하는, 태백에서도 차로 30분을 들어가야 하는 동네거든요. 운행하는 버스는 없습니다.


태백산맥의 정기를 뽑아 먹는 석포제련소, 네이버 지도


지금 기준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위치에 건설된 플랜트입니다. 하지만, 석포에 아연제련소가 건설된 1970년에는 최적의 위치였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은 대부분 폐광이 된 광산들이 당시에는 활발하게 채굴을 했고, 아래 도표에서 보시는 것처럼, 경북 봉화군은 탄광으로 유명했기 때문입니다. 지도로 보면 석포에 위치했던 금주광산이 석포제련소 옆에 붙어있습니다.


광산 현황, https://blog.naver.com/hsl5748/221134455070


위에 캡처한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석포제련소가 낙동강 상류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환경오염 문제로 10년 넘게 구설수에 오르고 있습니다. 무방류 시스템을 갖추고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하는 석포제련소가 낙동강 상류에 위치한 탄광 폐수를 처리하지 못하는 환경부 대신 마녀사냥을 당하고 있다는 주장과, 석포제련소를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 상류의 수질과 주변 토양 오염을 봤을 때, 명백한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 아직까지 대립 중입니다. (물고기가 사는 것도 직접 봤고, 어항으로 낚아서 손질한 물고기 배에서 나는 썩은 냄새도 맡았습니다. 석포에 머물렀던 사람으로서 누구의 손을 들어주기가 애매합니다..)


현장과 사무실 근무환경 비교


미생의 한석율처럼 현장 근무에 대한 로망이 가득한 사람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취준생들은 깔끔한 슈트를 입고 목에는 출입증개목걸이, 손에는 커피를 들고 출근하는 직장인의 모습을 희망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땀에 쩐 작업복과 낡은 안전화, 안전모에 짓눌린 떡진 머리보다 훨씬 근사한 모습이니까요.


언제 적 미생..


하지만, 현장 근무에도 장점이 있습니다. 엔지니어의 경우, 사무실에서 설계업무만 하고, 현장을 사진으로만 보는 것보다는 현장에서 라인 타면서 직접 봐야 확실히 많이 배울 수 있습니다. 현장 경험이 있으면 설계할 때 도움이 되는 것도 분명합니다. 또, 아침마다 입을 옷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그 시간만큼 더 잘 수 있고), 안 씻어서 (그 시간만큼 더 잘 수 있습니다) 꾀죄죄한 모습도 용서가 됩니다. 그리고, 이건 정말 특장점인데, 가끔 숙취로 힘들 때, 화장실 변기가 아니라 현장의 구석진 곳에서 쉬고 있어도 아무도 못 찾습니다.


겁나 익숙한 모습..


물론 제가 있었던 석포 같은 현장에서는 기차를 놓쳐서 주말을 반납해야 할 때도 있고, 세상 돌아가는 시간보다 내 시간이 훨씬 느리게 가고, 가끔 사고 쳤을 때는 현장이 아니라 형장 같고, 대부분의 여가 시간을 술로 채워야 합니다. 이런 일이 없다는 보장이 있다면, 현장 근무가 사무실보다 나은 것 같습니다.


한국 엔지니어링 회사 vs 글로벌 엔지니어링 회사


직접적인 비교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첫 직장인 한국의 엔지니어링 회사는 비철제련 플랜트를 운영하는 회사의 계열사이고, 해외 발주처들이 모두 추종하는 넘사벽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기준으로 건설할 거 아니면 가시오. 문은 저 쪽이오’라고 할 수 있는 ‘슈퍼을’이었습니다. 


반면 두 번째 직장은 해양플랜트에 설치되는 프로세스 모듈(Process Module)을 전문적으로 설계하는 글로벌 엔지니어링 회사였습니다. 한국 지사의 대표도 외국인이고, 사무실에 외국인 엔지니어도 많았던 정말 글로벌한 근무 환경이었지만, 국내 대형 건설사들이 주 고객이어서 전형적인 갑을관계를 경험했습니다. 


전 직장에서 설계하고 제작한 프로세스 모듈(Process Module)


한국 회사 vs 글로벌 회사의 구도로 굳이 비교하자면, 조직문화를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 회사는 상명하복이 법인 보수적인 회사였고, 글로벌 회사는 외국인이 많아서 모든 직원이 영어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인지 몰라도 상당히 수평적인 관계였습니다. 인텔과 구글이 사용해서 유명해진 OKR(Objective, Key Results)과 같은 경영 도구의 적용이 없이도 모든 임직원이 회사의 발전과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구성원 모두가 각자의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회사였습니다.


요즘은 많은 한국 회사들이 직급을 없애고 수평적 조직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만, 상명하복이 엄격한 군대식 문화도 장점이 있습니다. (좋은 사수를 만난다면) 사수로부터 도제식 교육을 받아서 업무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고 (사수가 좋은 습관을 가졌다면) 좋은 모습을 물려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시대로 정확하게 수행했다면 책임은 사수의 몫입니다 (성과도 사수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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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와 살이 없는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양가 있는 주제로 다음 주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좋은 한 주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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