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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Answer Jul 09. 2020

나는 운동부 출신입니다

실패와 두려움이란 삶의 무게를 견디는 방법

엘리트 선수

선수출신

운동부

체육 특기생

학생선수


한때 나를 명명할 때 사회가 쓰던 용어들이다. 그렇다.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대학교 1학년까지 농구선수였고 운동부였으며 엘리트 선수이기도 했고 체육 특기생이었으며 최근에는 나 같은 사람들을 학생선수라고 칭한다.
농구선수였던 어린 시절, 나의 꿈은 당연히 가슴에 태극마크를 다는 것이었고 연고전(또는 고연전)에 뛰고 싶었으며 프로선수가 억대 연봉을 받고 싶었다. 이 희망들은 지금의 어린 학생선수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난 국가대표는 고사하고 연고전에도 뛴 적이 없고 프로의 문턱을 밟아보지도 못한 선수로서는 실패한 인생을 살았다.


구선수로서의 시작은 좋았었다. 또래보다 상대적으로 큰 키와 덩치로 제법 실력발휘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의외로 키가 크지 않았을 적에도 기본기가 나름 탄탄해서 포지션을 전향하는 데도 큰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중3 때 교통사고가 일어난 후 모든 것들이 꼬이기 시작했다. 평소 먹성이 좋기로 유명했었는데, 운동을 쉬면서 음식조절을 실패하여 대책없이 불어난 체중이 발목을 잡았다. 또, 교통사고 후 발목 상태가 전보다 좋지 않았을 뿐더러 부상 걱정으로 인해 실력 발휘할 능력도, 이를 이겨낼 용기도 없이 막연함과 불안함이란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고교시절을 보냈다.

행히 운이 좋게도 대학은 갈 수 있었지만 대학선수로서의 실력 발휘는 커녕 훈련 일정을 소화하기에도 버거운 시간이 계속 되자 운동에 대해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남들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실력이 향상된 반면 계속 뒤쳐지는 기분이 들어 내 자신이 더욱 위축되었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계속 뇌리에 남았다. 그렇게 고민하던 시절, 중1 때 늦은 밤 야간 훈련을 한 후 집으로 향하던 내게 술에 취한 한 사람이 내게 건넨 말 한마디가 떠올랐다.


"그렇게 쌔가 빠지게 한 들 니 마음대로 되는 건 거의 없을거다! 그러니까 관둬라!"


 당시에는 왠 미친놈인가 싶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도 나와 같은 운동부 출신이었을 수도 있었겠다 싶었다. 돌이켜 보면, 내 마음대로, 내가 노력한대로 무언가를 성취한 적이 없었다. 교통사고 이후 물흐르듯 자연스러움이 아닌 억지스러움으로 근근히 버텼지만 더 이상 그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난 운동선수로의 삶을 포기하게 되었다.


연 성공한 운동선수가 몇이나 될까? 전체 10%도 되지 않을 것이다. 나머지 90%는 실패자로 낙인찍히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매일 지난 날을 후회하며 자책하면서 지낼 것이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

모두가 성공을 위해서 노력을 기울이지만 능력의 차이, 노력의 차이, 뒷배경의 차이 등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성공한 운동선수가 되지 못한다. 아무런 사회적 보호장치 없이 운동에만 매몰된 채 학업은 뒷전인 현재의 운동부 분위기 속에서 운동을 잘 하는 것 말고는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실패한 운동부 출신자는 치열한 사회에 내던져지고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을 해야만 할 뿐인 것이고.


 운동부 출신는 실패의 삶을 살아야 할까?

꽤나 멋진 수식어가 붙고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만 "성공"이란 단어을 달 수 있는 건가?

왜 우리나라 사회는 운동부 출신에게 그토록 곱지 않은 시선을 주는 것일까?

운동하는 사람은 왜 무식하거나 과격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일까?

그렇게 몇 십년 동안 시행착오를 겪어봤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운동선수를 꿈꾸는 수많은 학생선수들은 운동에만 매몰된 채 다른 꿈이나 활동에 제약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본인들 스스로 운동이라는 울타리 밖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일까?


"쟤네들은 운동만 해서 머리에 든 것이 별로 없어!"
"우리는 공부가 안되니까 운동하는 거야!"
"너희들은 운동에만 매진해!!그럼 성공할 수 있어!"


음에는 축구가 좋아서, 농구가 좋아서, 야구가 좋아서 시작한 운동이 시간이 흘러가면서 점차 이것밖에 할 줄 몰라서, 다른 것은 잘 못해서, 어쩔 수 없어서 등등 이유가 바뀌어가는 모습을 직접 경험했고 저 먼 발치에서 바라보기도 했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실패한 운동부 출신자는 사회적으로 대우받지 못하거나 차별을 당하며 하루하루 버텨야 하는 직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경제적이던지, 심리적이던지 상관없이. 우리와 같은 분류의 출신자들은 그렇게 힘겨운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게는 운동부 콤플렉스가 있다. 즉, 운동부 출신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떻게든 뭐라도 배우기 위해 애쓴다. 글을 쓰는 것도 역시 나의 운동부 콤플렉스를 감추고 이겨내고자 하는 몸부림일 수 있다.

사실, 난 정말 운이 좋게도 교직에 몸담고 있다. 이 교직사회에서도 "체육"교사는 상대적으로 무시받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경험상 "체육"교사는 그리 똑똑해보이지도 않고 일처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체육수업도 그저 그렇게 운영하는 한 마디로 전문성이 높은 교사라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역시 나의 피해의식일 수 있다. 내 생각이 100% 정확하다고는 말하지 못하지만 100% 부정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교직사회에서 주어진 일을 잘 처리하고 싶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대안을 마련하고 싶으며 체육수업도 노는 시간이 아닌 배움이 일어나는 시간이 되도록 나름 애쓰는 편이다. 스스로의 만족감도 있겠지만 남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싶지 않아서 더욱 더 아둥바둥한다.


 동안 운동부와 관련된 기사나 활동을 외면했었다.

하지만 얼마 전 고 최숙현 선수의 기사가 내 마음을 움직였다. 트라이에슬론이란 비인지 종목 선수로서 삶을 살아갈 때 그 자체로도 얼마나 힘들었을텐데.......동료선수들로부터 각종 심리적, 정신적, 육체적 폭력을 당했으니 이 얼마나 괴로웠을까. 극단적 선택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고민과 걱정, 분노가 있었겠지? 그 심정을 이루 다 헤아릴 수없을 것이다. 공감한다는 말이 얼마나 공허하게 느껴지는 지 새삼 깨닫게 되는 사건이다. 가해자로 지목된 그들의 모습에서 안타까움과 슬픔이라는 단어가 왜 이리 서글프게 느껴지는 것인가?


패한 운동부 출신자의 입장에서 고 최숙현 선수를 비롯한 동료선수들은 꽤나 성공한 운동선수다. 실업팀에 입단해서 본인이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운동을 지원받으며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성공"이라는 말이 속빈 강정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실패한 운동선수다. 인간으로서 가져야 마땅한 연민과 동료애, 사랑이 없으므로. 한 사람을 죽음으로까지 내민 그들에게 "성공"은 없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성공"과 "실패" 에 대해서 개념적, 관습적인 이미지를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긍정과 부정

좋음과 나쁨

최고와 최악

이라는 이분법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새로운 시대의 뉴노멀이 요구된다.

그래야만 소수보다 다수가 행복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UCLA  농구감독이었던 존 우든 감독이 말씀하신 "성공"의 정의가 떠오르는 건 새삼스럽지 않다.

성공은 마음의 평화입니다.
마음의 평화는 자신이 노력했다는 것을 아는 '자기만족'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죠.
그 노력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마도 난 한 동안 아니면 평생 운동부 콤플렉스를 지닌 채 살아갈 것이다. 지금처럼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할 것이고. "실패"라는 무게감을 위로와 격려, 공감이란 말로 그 힘듦을 작은 도움이 될 수는 있겠으나 그 자체의 무게를 덜어내줄 수는 없다.

그저 본인 스스로 실패 그 자체를 인정하고 자신의 힘으로 이겨내는 수밖에. 나처럼 실패한 운동부 출신자를 비롯해 여러 분야에서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이 그 경험을 받아들이고 이겨내는 데 이 글이 조금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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