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_수녀 선생님
도서관에 가끔 들르는 수녀 선생님이 계신다. 가톨릭 재단의 고등학교다 보니 신부님도 계시고 수녀님도 계신다. 자세히 어떤 과목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지는 잘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이 수녀님이 책을 아주 좋아하는 분이시라는 것. 늘 설렘이 잔뜩 담긴 발걸음으로 오셔서 밝고 발랄한 목소리로 주위를 기분 좋게 만드는 아우라를 풍긴다. 책으로 가득 찬 도서관이 정말 좋다고,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런 기운이 그분 자체에서 느껴진달까.
오늘은 도서관 입구 한구석에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방치되고 있던 책을 폐지 처리 해야 하는 날이었다. 책들은 도서관에 등록된 책은 아니고, 어느 부장선생님인지 누구인지가 '기증'이라는 명목으로 떠맡기고 간 것들이다. 아마 함부로 버리기에 책들의 주인이 높은 직급의 선생님이어선지 하염없이 방치되다 드디어 허가(?)가 떨어져서 폐기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폐지를 처리하려면 도서관에서 계단 한 층을 내려가 왼쪽으로 꺾어 중앙 현관 앞 운동장까지 이 책들은 옮겨야 한단다. 책꾸러미의 개수로 보나 무게로 보나 나 혼자는 도저히 엄두가 안 나는 일이다. 며칠 전 도서관 담당 선생님이 인력배정이 힘들게 되었다고 고민만 하시더니 오늘 당일, 아무런 연락이 없다. 늘 켜져 있던 교내 메신저마저 오프라인 상태. 자리에도 안 계신다. 이 답 없는 대책이 황당하다. 그냥 나 보고 다 하란 소린가, 싶은 확인되지 않은 배신감까지 드는데. 마냥 펼쳐놓고 한참을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에라 모르겠다, 그냥 나 할 만큼만 옮기자 맘먹는다. 일단 점심시간에는 도서부원 두 명의 도움으로 백과사전같이 두꺼운 책 두 묶음을 카트로 옮기고, 그 외는 그냥 쌀포대에 내가 옮길 만큼만 책을 넣고 운동장까지 끌고 가기로 한다.
엄두가 안나 우두커니 앉아있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솔직한 나의 마음은 처량함이었다. 아, 내 위치가 이런 거였지. 톡 까놓고 뒤치다꺼리하는 거. 도서관에서 책과 함께 하는 사서라는 허울 뒤에서 고상한 척하고 있었지만 결국 나는 이런 뒤치다꺼리를 하려고 뽑혔구나,라는 불확실하고도 부정적인 생각의 늪속에 한없이 빠져들려던 찰나였다.
그때 언제나처럼 온통 밝은 기운으로 무장하신 수녀 선생님이 도서관에 오셨다. 얼만 전 들어온 새책들을 보러 왔다고 신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신간 서가 쪽으로 직진하신다. 잠시동안은 책을 살펴보실 거 같아, 금방 책들 좀 운동장에 내놓고 오겠다 말씀드리니 어느새 성큼 다가와 같이 하자시며 쌀포대 한쪽을 잡으신다. 내가 괜찮다고 해도 "저 남는 게 시간이에요"라는 말로 마음을 편하게 해 주신다. 아주 무거운 쌀포대도 아닌데 옆에서 보태주는 작은 힘이 딱딱하게 굳어 있던 내 맘에 온기를 건넨다.
오늘이 학교 전체 폐지 버리는 날이라 마침 도서관 서고에는 본인 과목의 교과서 폐지를 처리하러 들린 선생님들이 더러 있었다. 서고를 오고 간 어느 선생님에게 빈말로도 듣지 못한 말이었다. 물론 본인의 일만 하고 가신 선생님들이 잘 못한 것은 전혀 없다. 내 좁은 마음에 괜히 드는 섭섭함 정도지, 그 분들에게 뭐라 할 일은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본인의 손을 기꺼이 내어주신 수녀 선생님의 마음이 고맙기 그지없는 것이다.
수녀 선생님은 두 번을 그렇게 손은 보태주신다. 책 포대를 함께 끌며 나누는 대화도 즐겁다. 역시 책을 좋아하는 분이라 이야기도 더 통하는 기분이다. 단기간 일하고 떠날 곳이라 사람에게 깊은 정 들 일이 있을까 싶었는데. 작지만 확실한 친근함을 느낀 순간이었다.
수녀선생님이 도서관을 떠나시고 나는 다시 복사용지 박스에 가능한 만큼만 책을 넣고 서너 번을 더 오가며 폐지를 버리고 왔다. 오가는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