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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소유 Feb 05. 2024

김태희보다 예쁘다더니

어른도 자란다

    “엄마, 목소리 좀 낮춰.”

   딸아이와 외출하는 길에 전화가 와서 받았다. 잠시 지인과 수다를 떨다 보니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나 보다. 그도 그럴 것이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수화기 너머로 내 소리가 안 들릴까 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지기도 한다. 처음 딸아이의 지적을 받았을 땐 내 목소리가 좀 컸나 싶어 바로 수긍했는데 아이의 지적이 여러 번 반복되니 차츰 의심이 든다. 정말 엄마 목소리가 커서 옆구리를 찌른다기보다 그냥 밖에서 소리 내서 통화하는 엄마가 부끄러워서 그런 게 아닐까 하고.


  통화할 때만이 아니다. 밖에서 이야기를 하다가 내 웃음소리가 조금만 튀어도 미간을 찌푸리고 제 입술 앞으로 검지를 세우고 “쉿!” 한다. 내가 장난으로 “엄마가 그렇게 부끄럽냐?”하고 울상을 지어 보였더니 말만 아니라고 할 뿐 돌아서는 아이 표정 속에 답은 확연했다. 아닌 척했지만 내심 아연했다. 초등학교 4학년이던 작년까지만 해도 엄마가 ‘김태희’보다 예쁘다더니. 드디어 우리 딸 눈에 씐 엄마 콩깍지가 벗겨졌구나.


  근데 정말 내 목소리가 커진 건 아닐까. 내가 남을 의식하던 데시벨의 기준이 언젠가부터 더 낮아진 건 아닐까. 혹은 내 귀의 청력도 나이를 먹어서 내 목소리가 잘 안 들리다 보니 자연히 소리가 커진 것일까. 흔히 아줌마가 되면 어디서나 목소리가 크다, 부끄러운 줄 모른다는 말을 하곤 한다. 오래전에 아줌마라 불릴 나이가 되었지만 은연중에 그런 이미지의 아줌마가 되고 싶지 않았던 건지, 마음 한구석엔 누가 ‘아줌마’라 불러도 모른 척하고 싶은 마음이 늘 있었다. 그래서 아이에게 밖에서 내 목소리가 크다는 지적을 받을 때마다 아이의 엄마 사랑 콩깍지가 벗겨졌니 마니 아이 탓을 하면서 은근슬쩍 아줌마의 굴레를 벗어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동해남부선을 타고 부전역에서 출발해 종점인 울산 태화강역까지 하루 동안 여행을 하는 행사에 참여했다. 동해남부선을 타고 지정된 역에 내려 주변을 다니고 역 안에서 문화 공연을 관람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여행의 마지막인 태화강 역에 도착하니 저녁 무렵이었고 밖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기다리는 공연은 클래식 공연이었다. 관현악 공연과 혼성 중창 공연, 관악 5중주 공연을 연달아 감상하다 보니 내 마음은 창밖에 내리는 비처럼 촉촉이 젖어들었다.


  중창단의 공연을 들을 때였다. 관중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 누구나 잘 아는 노래를 들려주었는데 신나는 노래에 어깨가 절로 들썩이며 나도 모르게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였을까.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나는 들릴 듯 말 듯 흥얼거리는 것이 아니라 진심 흥이 나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큰 목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만약 딸아이가 옆에 있었다면 기겁을 하며 도망가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났다.


  어릴 적 나는 엄마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누군가의 노래를 따라 부르면 그냥 그 모습이 부끄러웠다. 엄마는 노래를 좋아하고 잘 부르는 편이었다. 그런데도 높은 고음의 발성으로 마치 성악가가 부르는 것처럼 남들 앞에서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 꼭 내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처럼 두 볼이 뻘게지 곤 했었다. 내 딸처럼 엄마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무안을 주지는 않았지만, 나도 엄마가 창피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아이의 이런 변화는 자라면서 엄마 이외의 세상으로 눈을 넓혀가는 당연한 과정의 일부라고 이해하면서도 어른이 나이 들면서 자연스레 변해가는 과정은 자식의 이해를 받지 못하는 것 같아 어른의 편에서 씁쓸한 마음도 든다. 그래서 자식이고 그러니 부모인 걸까.


  ‘아이는 커가고 어른은 늙어간다’ 우리는 때때로 이런 자조의 말을 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아이가 커가는 만큼 어른 역시 커가는 중이다. 나이를 먹는다고 다 어른이 아니고, 키만 컸다고 해서 다 자란 것은 아니니 말이다. 아이들이 자라며 성장통을 겪듯 어른들도 그런 과정이 있을 것이다. 어른의 성장통을 ‘늙어서’라는 말로 뭉뚱그려버린다면 뭔가 억울하다. 늙어간다는 말보다는, 성숙한 어른으로 자라는 중이라는 말이면 좋겠다. 그리하여 나는, 엄마가 ‘김태희’보다 예쁘지 않다는 진실을 깨닫고 만 딸의 성장을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어른으로 자라는 중이다.(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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