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송세월
군 대학 즉 사관학교는 여름과 겨울에 방학이 아닌 하계, 동계 휴가를 보내주었다.
휴가 기간은 3주에서 4주 정도로 대학의 방학에 비하면 무지막지하게 짧았다.
그래서였을까.
점호 음악이 없는 고요한 아침으로 시작되는 휴가 기간 동안 행복감이 안개처럼 끼어 있었다.
그런데 휴가를 허송세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의문이 자책의 모양으로 떠오를 때도 있다.
휴가동안 해야 할 것들과 하고 싶은 일들은 3열로 늘어섰는데 실 생활이 별 볼일 없어 보이면 더욱 그렇다.
방학의 끝장은 물리 법칙처럼 여지없이 다가오고, 이러한 자책은 갑갑함을 만든다.
산문집 허송세월의 김훈 작가님도 책 속의 언어로 되뇐다.
- 시들어 가는데 못한 일이 너무 많다.
빛나는 작품과 글들을 수 없이 남기신 후 어렵게 쓰신 문장이 결국 ’ 허송세월‘이라니.
욕망과 기대에 비해 너무 짧아 허송세월로 수렴되는 삶의 난제를 작가님은 어떻게 풀어내는가.
김훈 작가님께서 직접 드로잉 한 책 표지가 곧 책에 담겨있는 난제에 대한 대답이다.
함께 사는 소시민들의 삶과 역사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공감하기.
주변을 감싸는 동물과 식물, 환경을 면밀히 살펴보고 아름다움을 추출하기.
향기롭고 냄새나는 말과 글을 구분하고 자신을 돌아보기.
사실에 입각한 정의가 제대로 세워져 있는지 묵묵히 고뇌하기.
김훈 작가님 특유의 담담한 글에서 엿볼 수 있는 그의 시각과 시간에 애독자로서 감히 말해본다.
작가님의 세월은 허송보단 진하고 묵직합니다.
회사생활을 시작하고 운 좋게 한 달의 방학이 주어졌고, 이제 열흘 남짓 남았다.
물리적 시간과 심리적 기대의 비대칭에서 오는 갑갑함을 이겨내고,
담담하고, 간결하게 삶이 우리에게 선사한 정수를 바라볼 수 있기를 소원해 본다.
옆동네 일산에 사는 작가님의 시선을 쫓아.